「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최고의 예술성과 굉장한 권력을 함께 갖고 있는 지휘자 카라얀 그는 최상의 매표수익을 확보하고 있으며, 카라얀 제국 Karajan Empire으로 불리는 베를린 필하모닉·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잘츠부르크 강림절 음악제·잘츠부르크 여름음악제·영화·비디오-카세트·카라얀 재단·카라얀 국제지휘자콩쿠르·레코드계 등에 군림하고 있다.
카라얀은 1908년 4월 5일에 외과 의사인 에른스트 폰 카라얀과 슬라브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연주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피아노를 친 카라얀은 5세때 공개석상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했다.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던 그는, 이 음악원 원장 파움가르트너에게 인정받아 특별지도를 받았으며, 이 음악원을 마치고 비인 음악원으로 진학하게 된다. 카라얀의 지휘자로서의 길은 비인 음악원에서 프란츠 살크에게 지휘공부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1977년∼29년까지 비인에서의 공부를 마친 그는 이 해에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지휘자로서 데뷔하고, 이때 그의 지휘솜씨를 인정한 울름 Ulm 시립가극장 지배인의 초청으로 21세의 나이에 울름 시립가극장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하면서 이곳의 지휘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6세에는 아헨의 음악감독으로 옮겼다가, 1937년에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여 「전설적인 연주」였다는 찬사와 함께 점차 베를린에서의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종전 후, 아헨에서 나치에 입당했었다는 사건 때문에 한동안 활동이 중지되었다가 1947년에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재기했다. 이 무렵 카라얀은 유명한 레코드 프로듀서 발트 레게 (런던 EMI의 고전음악 담당)와 만나 음반제작 일에 몰두한다. 그로우브 사전에 카라얀을 오페라 프로듀서로 기록한 것도 따지고 보면 발트 레게와 함께 일하면서 전문가적 자질을 키웠기 때문일 것이다.
카라얀이 발트 레게와 함께 제작한 음반은 1948년에 내놓은 슈베르트의 「피아노협주곡」(필하모니 오케스트라,디누 리파티의 피아노 협연)을 비롯하여 많은 오페라를 레코딩하였다.
1949년에 카라얀은 라 스칼라에 데뷔했고, 이후부터 잘츠부르크·바이로이트 등에서 눈부신 활동을 벌이다가 1954년 11월 푸르트벵글러의 사망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포디움(지휘대)에 오르게 되며 마침내 그곳의 종신 지휘자가 되어 카라얀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레코드 제작에도 남다른 카라얀은 지금까지 800장 이상의 음반을 제작했으며, 1977년 발매한 베토벤의 교향곡 음반세트는 800만 세트 이상이 팔렸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명반
◎ 베토벤의 9개 교향곡전집. 카라얀은 50년대, 60년대, 70년대 그리고 80년대에 걸쳐 4회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했으며, 이중 최고의 명연은 베를린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비인 악우협회 합창단(제9번 교향곡)의 연주 레코드가 꼽히고 있으며, 이 레코드로 프랑스 디스크 대상과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 말러의 교향곡 제9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 표제음악의 매력을 최고로 발휘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
◎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6번 「비창」. 1948년 비인 필과의 SP로 최초 녹음한 이래 7회 레코딩했는데, 이중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명연으로 꼽히고 있으며,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올 수상했다.
◎ 홀스트의 조곡 「혹성」. 두 번 레코딩했는데, 처음의 비인 필과의 녹음보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레코딩이 명반으로 꼽힌다. RIAS 실내합창단 협연.
◎ 베르디의 오페라 「오델로」.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비인 국립오페라단연주. 남녀 주역에는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출연.
◎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합창단
연주. 주역에는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베이스 니콜라이 갸로프 등이 출연했으며, 이 레코드로 프랑스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두 번 레코딩했다. 명연은 소프라노 카티아 리치아렐리, 테너 호세 카레라스 주역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가 꼽힌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주역에는 소프라노 안나 토모와-신토우, 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 테너 르네 콜로, 바리톤 쿠르트 몰이 협연하고 있다.
◎ 말러의 교향곡 제4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에 소프라노 에디트 마티스가 협연. 이 음반으로 독일 레코드상을 수상했다.
◎ 브라암스 4개의 교향곡 전집.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프랑스 디스크대상 수상 음반.
◎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0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으며, 이 음반으로 독일 레코드상 수상.
◎ 드볼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에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협연.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과 프랑스 디스크 대상 수상 레코드.
◎ 멘델스존과 브르흐의 바이얼린 협주곡.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의 협연.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 수상 레코드.
◎ 베토벤의 트리플 콘체르토.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협연.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과 프랑스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찬 페라스의 협연.프랑스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게오르그 솔티 Georg Solti」
33세라는, 지휘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에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으로 지휘자로서 재출발한 게오르그 솔티는 1912년 10월 21일 부다페스트의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5세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4년 후에는 직업적인 가수였던 그의 누나의 반주를 해주었으며, 12세가 되었을 때는 용돈을 벌기 위해 부유한 집의 아이들에게 피아노 교습을 하기도 했다.
13세 때 그는 부다페스트 음악 학교의 피아노 클래스에 입학, 1년 후 에리히 클라이버가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지휘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나서 미래의 희망을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바꾸기로 결심 작곡과와 지휘과에 등록하여 코다이·도흐나니·레오 바이너 밑에서 공부했다.
음악 학교에 입학한지 2년 후에는 부다페스트 오페라의 지도자 Coach가 되었는데 피가로의 결혼」을 단 한 번 지휘하고 졸업한다. 솔티는 1937년의 여름 한 철을 잘츠부르크 음악축제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마적」 제작에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발탁, 토스카니니에게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1939년 솔티는 부다페스트 오페라에서 호디 장군의 반 셈족 추방기간에 해고당하여 헝가리를 떠나 스위스로 가서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 주네브 음악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우승, 남은 전쟁 기간을 피아노 독주회나 가수들의 반주와 협연으로 보낸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는 자신의 지휘경력을 쌓을 만한 자리를 물색, 그때 이미 33세라는 지휘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한때 도흐나니의 학생이었던 킬레니라는 바바리아 지역의 연합군 음악장교에게 일자리를 부탁, 그의 알선으로 슈투트가르트에서 「피델리오」를 지휘하여 성공, 바바리안 국립가극장의 수석지휘자 자리를 얻게 되었고 두 달 후에는 음악감독이 된다.
그 후 6년간 솔티는 무니히에 머물며 지휘의 기초를 닦아나간 뒤 1952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9년간을 보낸다. 1961년 9월부터 솔티는 영국 코벤트 가든의 음악감독직을 맡아 이 극장을 영국이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전문적이며 중요한 국제적인 왕립 오페라 하우스로 변모시킨 공로로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의 작위를 받기까지 한다.
1971년 솔티는 25년 동안의 오페라 음악감독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미국 제일의 정상급 오케스트라인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이 된다. 그러는 한편 그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초대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되고 1983년까지 음악감독의 자리도 맡는다. 또한 1972년부터 1975년까지의 기간 동안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서도 일한다.
솔티의 주요업적 중 하나는 바그너의 「반지」에 대한 10년 동안의 연구인데 코벤트 가든에서 이 악극을 지휘했고 또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데카에서 음반으로 실었던 「니벨룽겐의 반지」를 1983년 바그너 서거 10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바이로이트에서 제작자 피터 홀 경과 함께 다시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대부분 한두 오케스트라와 함께 일하는데 그 이유를 균형과 구성에 관한 한 최소한 자신이 믿는 바를 실현시킬 수 있으며 어떤 소리의 이미지를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게오르그 솔티의 명반
◎ 브룩크너의 교향곡 제7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제5번 「운명」·제7번·제9번 「합창」.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시카고 합창단(제9번)의 연주. 그래미상 수상 레코드.
◎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3번·제4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9개 교향곡 전집.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8번 「천인의 교향곡」.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인 국립가극장 합창단, 비인 악우협회 합창단, 비인 소년합창단 협연. 이 음반은 국제 레코드 비평가상 IRCA을 수상했다.
◎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전곡.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이 음반으로 몬디알레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 쇤베르크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
◎ 바르톡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바르톡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알반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협연.
◎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독일 레코드상 수상 음반.
◎ 브라암스의 도이치 레퀴엠.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의 연주. 솔리스트 협연에는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 바리톤 베른트 바이클. 이 음반으로 독일 레코드상을 수상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Carlo Maria Giulini」
음악계의 신사, 또는 신비주의자로 일컬어지는 줄리니는 1914년 5월 9일 아풀리안 코아스트의 바르레타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시골에 살면서 그가 처음으로 음악적인 체험을 겪은 것은 거리에서 돈을 구걸하기 위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면서 연주하던 집시 바이올리니스트와의 만남이었는데, 그가 5세가 되자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 영토가 된 볼짜노로 이사, 그리하여 어린 줄리니는 중부유럽의 음악적 유산, 즉 왈츠·시골 춤·헝가리와 체코 민요 등을 접하게 되었다.
볼짜노로 이사온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때 줄리니는 선물로 바이올린을 받고 그때부터 그 지방 유치원의 수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다. 그러나 곧 정식 바이올린 선생을 구해 수업을 받았는데, 그 후 9년 동안 그는 학교에 가기 전, 새벽부터 아침 8시까지 바이올린 수업을 받았고 14세 때에는 우연히 산타 체칠리아 음악 학교에 재직 중인 선생을 만나 오디션을 받게 되는데 그의 권유로 로마에 있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 작곡 클래스의 최연소학생이 되었다.
18세가 되었을 때 줄리니는 국가자격시험에 따라 아우구스테오 오케스트라의 20번째의 비올라 자리를 신청하여 그 자리를 확보, 오케스트라 연주자로서의 생활을 시작, 20세 때는 주로 친구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한다. 이 시절 그는 이 일, 즉 지휘를 하는 일이야말로 자기가 원하던 일이자 꼭 해야만 될 일이라는 결심을 하고 시에나에 있는 치지아나 음악학교의 작곡가 알프레도 카셀라의 마스터 클래스에 등록, 시에나를 떠난 후에는 3년 동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의 마스터 클래스에 다녔고, 최종 시험을 잘 치른 결과 그 학교의 연주회를 지휘할 수 있는 초청을 받았지만 그는 파시즘을 혐오하며 잠적해 버린다.
1944년 6월 로마가 파시즘으로부터 해방되자 줄리니의 반파시스트운동이 인정받아 전쟁전 수상의 대가로 주어진 아우구스테오의 연주회를 지휘해 달라는 초청을 받는다. 이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젊은 이탈리아 작곡가인 살비우치의 「서주와 파사칼리아 그리고 피날레」,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라암스의 「교향곡 제4번」이었다. 이 연주회에서 인정받은 줄리니는 같은 해인 1944년 로마 방송관현악단의 페르난디 프레비탈리의 대리인 역을 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음악감독직을 맡는다.
1950년 줄리니는 새로 창설된 밀라노 방송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1년 동안 일하다 1952년 라 스칼라의 부지휘자로 초빙되었으나 1953년에는 음악감독으로 임명된다. 그 후 3년 동안 그는 라 스칼라에서 롯시니의 「이탈리아의 알제리인」, 「세빌리아의 이발사」, 베르디의 「춘희」 등을 공연하여 전후시대의 위대한 오페라의 승리를 가져온 장본인이 되었으며 가장 위대한 오페라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서의 명성을 구축하였다.
1956년 줄리니는 라 스칼라를 사임하고 그 이후 12년 동안 네덜란드나 에딘버러 음악제에서, 또는 런던 코벤트 가든이나 로마에서 오페라를 계속 지휘하였으며 1960년에는 이스라엘 필하모닉을 이끌고 세계 연주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1973년에서 1976년까지는 비인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있었으며, 1978년 로스앤젤레스 필의 음악감독직을 맡아 지금까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인간적인 따뜻한 관계 속에서 신비로운 음을 창출해 내고 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명반
◎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슈만의 교향곡 제3번 「라인」.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브룩크너의 교향곡 제7번.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브룩크너의 교향곡 제8번.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브라암스의 교향곡 제2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9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 전곡.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남자 주인공에 바리톤 레나토 브루존 출연.
◎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전곡.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비인 국립가극장 합창단
연주. 남녀 주역에 바리톤 피에로 카프칠리,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소프라노 일레아나 코루트바스가 출연했다. 이 음악으로 프랑스의 디스크 대상과 독일 레코드상을 수상했다 .
◎ 베르디의 「레퀴엠」.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에 솔리스트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쉬바르츠코프가 출연.
◎ 드볼작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에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이 음반으로 프랑스 디스크 대상 수상.
◎ 베토벤의 교향곡 제6번 「전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독일 레코드상을 수상했다.
◎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의 협연. 그라마폰상과 에디슨상, 그리고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레코드이다.
◎ 브라암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의 협연. 이 음반 역시 프랑스 디스크 대상과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순수한 미국인 지휘자라고 불리는 번스타인은 1918년 8월 25일 미국 보스턴 근교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유태계 우크라이나인 이민 가정이라 가난을 면치 못했던 그는 8세 때에야 피아노 공부를 시작, 그러나 15세에는 매사추세츠 주립교향악단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재능을 보였다. 그후 번스타인은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여 음악공부를 계속, 1939년에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관현악법을 다시 공부하는 한편 프릿츠 라이너에게 지휘수업을 받았다.
지휘자로서 데뷔는 23세 때 하버드 학생오케스트라와 자작의 극장음악 「아스토파네스의 평화」를 연주한 것이 처음이나, 1940∼41년 탱글우드 음악제에서 쿠세비츠키에 발탁되어 보조 지휘자로 활동한 것이 공식데뷔. 이어 1944년 와병 중의 브루노 발터를 대신하여 단 한 번의 리허설도 없이 뉴욕 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화제를 뿌리면서 세계 지휘계에 부상했다.
계속해서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보스턴·뉴욕 시립·이스라엘 필과 같은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며 명성을 쌓아간 번스타인은 마침내 1957년 미트로폴로스의 뒤를 이어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9세였는데, 이후 그는 뉴욕 필의 상징으로 11년간 머물다가 1969년 피에르불레즈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좀더 창작의 세계에 전념하고 싶다」는 말 그대로 계관지휘자의 칭호를 받고 창작과 객원 지휘로 보내고 있다.
한편 지휘에 못지 않게 작곡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는 20대 초반에 발레음악 「팬시프리」로 작곡가로 입신하고 있으며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교향곡 3개, 다수의 합창곡, 칸타타, 오페라, 뮤지컬, 영화음악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번스타인은 슈만의 「피아노 5중주」,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를 비롯하여 모차르트·라벨·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의 레코드를 남기고 있으며, 이밖에도 1954년 미국 CBS 텔레비전에서 처음 방영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음악의 기쁨」, 「대답 없는 질문」 등의 명저서도 남기고 있는 그는 22세에 발레 디어터 오케스트라와 자작곡 「팬시 프리」를 첫 레코딩한 이래 수많은 레코드를 남기고 있다. 바로크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즐겨 레코딩한 그는 특히 즉흥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연주로 고전·낭만·현대음악에 뛰어난 명반을 남긴 반면 오페라에는 그렇게 집착하지 않은 편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명반
◎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전집. 1961∼64년 사이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전곡 레코딩했으며, 1978∼79년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전곡 레코딩하였다. 비인 필과 연주한 이 음반으로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과 독일 레코드상 수상.
e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 전곡.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비인 국립오페라단이 협연했으며 소프라노군둘라 야노비츠, 테너 르네 콜로, 바리톤 디트리히피셔-디스카우가 주역으로 출연.
◎ 베토벤의 미사 솔렘니스.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힐버숨 네덜란드 방송합창단이 협연했으며 솔리스트에는 소프라노 에다 모저, 알토에 한나 슈바르츠, 테너에 르네 콜로, 베이스에 쿠르트 몰이 출연. 프랑스의 레코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 슈만의 교향곡·협주곡 전집.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으며, 피아노 협주곡에는 피아니스트 유스투스 프란츠, 첼로 협주곡에는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협연했다.
◎ 브라암스의 교향곡·협주곡 전집.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레코딩한 4개의 교향곡 전집은 프랑스의 레코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의 협연에는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 하나뿐인 바이올린 협주곡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협연했다
◎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6번 「비창」.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3번.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 .
◎ 말러의 교향곡 제4번과 제9번.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스토리」 전곡.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으며, 소프라노 키리테 카나와, 테너 호세 카레라스가 남녀 주역으로 출연했다.
◎ 말러의 교향곡 제4번.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에 소프라노 레리 크리스트가 협연했으며, 이 음반은 스위스의 몽드뢰 국제레코드상을 수상했다.
「클라우스 텐슈테트 Klaus Tenstedt」
45세 때까지 동독의 슈베린에서 국립가극장의 무명 음악감독으로 있다가 서방세계로의 탈출을 강행한 텐슈테트는 1926년 6월 6일 독일 메르세부르크에서 바이올린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4년 후에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16세가 되자 위대한 콘서트마스터가 될 꿈을 갖고 라이프찌히 음악학교에 입학했고 22세 때인 1948년에는 할레의 무니치팔 극장의 초대 콘서트마스터가 됨으로써 자기 야망의 성취를 위한 첫 발을 내딛는다. 1958년 그는 드레스덴 국립가극장의 지휘진과 합류하게 되었고 4년 후에는 슈베린의 음악감독에 임명, 서구로 망명하기까지 9년간을 일하였다.
서구에서의 첫 7년을 텐슈테트는 고텐부르크의 슈토라 극장, 그리고 스웨덴 라디오 방송 오케스트라에서, 또 키일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서 주목을 받으면서 보냈지만 1947년 토론토에서의 성공적인 공연으로 하룻밤 사이에 무명으로부터 도약,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해 달라는 초청을 받는다. 그 공연 후에는 또 탱글우드 음악제에 출연하게 되고 그 일 년 후인 1977년 9월, 텐슈테트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함으로써 영국 무대에 데뷔했다.
1978년에는 말러의 1번 교향곡이 포함된 프로그램을 갖고 런던 필하모닉을 지휘, 런던 필하모닉은 그가 1980년 수석 객원지휘자가 되기 전까지 매 시즌마다 몇 주간씩 그를 다시 초청하다가 1년 후 솔티가 음악감독 자리를 퇴직하자 텐슈테트에게 수석지휘자 겸 음악감독의 자리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다. 텐슈테트는 그 이전의 런던 필하모닉의 지휘자였던 솔티의 생동력과 하이팅크의 더욱 완화된 악보 프레이징과 악보에 대한 예민한 감각 등 그 두 사람의 장점을 모두 갖추었다는 찬사를 받으며 런던 필하모닉을 이끌어 갔다.
텐슈테트의 지휘 스타일은 강렬하고 박력 있으며 발레하는 것 같다고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43세 때에 매우 강렬한 느낌으로 말러를 이해하기 시작한 이래 말러 연구에 몰입, 말러의 뛰어난 해석가로 유명하다.
클라우스 텐슈테트의 명반
◎ 말러의 교향곡 제3번.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8번 「천인의 교향곡」.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1번 「거인」.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4번.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솔리스트 협연에는 소프라노 루치아 폼 출연 .
◎ 말러의 교향곡 제9번. 런던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 .
◎ 말러의 교향곡 제7번 「밤의 노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변용」.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
◎ 바그너의 관현악곡 제1집.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발퀴레의 기행」 등 바그너 악극에 나오는 관련 악곡 5곡이 수록되어 있다.
◎ 바그너의 관현악곡 제2집.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바그너의 악극 전주곡 및 서곡을 싣고 있는데, 「탄호이저」 서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등 4곡이 수록되어 있다.
「콜린 데이비스 Colin Davis」
한 사람의 지휘자로서 뿐 아니라 프랑스 음악의 전문가, 특히 베를리오즈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고, 때때로 시도 쓰는 콜린 데이비스는 1927년 9월 25일 영국 웨이브릿지의 써리에서 칠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데이비스 가족은 아주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피아노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아버지는 전축을 가지고 있었고, 상당한 양의 클래식 음반을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신경을 써서 음악을 듣게 했다.
데이비스는 11세 때 친척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퍼블릭 스쿨에 들어가는데 거기서 생활하는 중 상급반 학생으로부터 클라리넷을 배워 곧 그는 학교 연주단에서 클라리넷을 매우 잘 연주하는 우수한 단원이 되었다. 그는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친구들 및 선생들과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거나 녹음된 음반을 들으며 보냈다.
13세가 되던 해 그는 녹음으로 된 베토벤의 8번 교향곡을 들었는데 그 음악에서 나오는 무한한 힘과 아름다움, 심지어는 그 음악의 광폭성까지도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 음악에서 그는 자기의 생을 음악에 헌신하라는 신의 부름을 듣고 장래에 음악가, 특히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데이비스는 독학으로 공부하여 런던 왕립음악대학에 갈 수 있는 자격증을 획득했으나 피아노를 칠 수 없었기 때문에 지휘과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음악대학을 졸업하던 해 그는 군대에 자원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군악대에서 보냈으며 때로는 퍼레이드나 커다란 연회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그 무렵 몇몇 음악가들의 모임에서 스스로 칼만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매주 수요일 베이스와츠 지하실에서 모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지휘자로 데이비스를 선택, 이 관현악단은 나중에 발전하여 첼시아 오페라단이 되었다.
첼시아 오페라단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공연하면서 출발했는데 데이비스는 그들과 함께 1950년에 지휘자로 데뷔, 「극장 지배인」과 「돈 조반니」를 연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또 지휘뿐만 아니라 여러 관현악단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으며 생활을 위해 섬머 스쿨의 교수, 개인교수, 지방 관현악단과의 공연 등 잡다한 일을 해야만 했다.
1957년이 되어서야 그의 떠돌이 생활은 끝나고 BBC 스코틀랜드 오케스트라의 보조지휘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1959년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공연한 「돈 조반니」에서 오토 클렘페러 대신 지휘를 하게되면서부터 그는 크게 부각되고 곧이어 새들러즈 웰즈 오페라의 지휘를 맡아 5년 동안 일하다 1965년 사임, 침체기를 보낸 뒤 1967년 BBC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면서 그가 개인적 사생활과 음악적으로도 빠져 있던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게 된다.
1971년부터 데이비스는 코벤트 가든의 지휘자로 일했으며 1983년에는 뮌헨의 바바리안 방송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지명되었으며 보스턴이나 암스테르담 관현악단과의 정기적인 계약 외, 세계 일급 관현악단들과 관계를 맺어 그들을 지휘하고 있다.
데이비스의 음악활동 중 그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은 티페트를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 1970년에 그의 작품 「The Knot Garden」을 초연하였고, 1977년에는 「냉전」을 티페트에게 헌정하여 최초로 지휘한 일이며, 그는 음악적인 견지에서 분만 아니라 인간적 견지에서도 티페트를 매우 존경한다고 한다.
콜린 데이비스의 명반
◎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트로이인」. 코벤트 가든 왕립가극장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남녀 주역에는 테너 존 비커스, 메조 소프라노 조세핀 비지가 출연하고 있다.
◎ 베를리오즈의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솔리스트로 테너 라일랜드 데이비스, 베이스 존 셜리커크가 협연.
◎ 베를리오즈의 극적 교향곡 「메피스토의 겁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앰브로지언 합창단 연주. 솔리스트로 테너 니콜라이 겟다, 바리톤 엣토레 바스티아니니, 메조 소프라노 조세핀 비지가 협연하고 있다.
◎ 모차르트의 협주교향곡 Eb장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튀르 그뤼미오, 비올리스트 아리고 펠리치아가 협연. 프랑스 레코드 대상을 수상했다.
◎ 베를리오즈의 레퀴엠.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와 앰브로지언 합창단 협연.
◎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 드레스덴 국립오케스트라와 드레스덴 국립가극장 합창단 연주. 남녀 주역에는 테너 피터쉬라이어, 소프라노 마가레트 프라이스, 베이스에 데오 아담이 협연하고 있다.
◎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제3번·제5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튀르 그뤼미오의 협연. 이 음반으로 프랑스 레코드 대상을 수상했다.
◎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전집.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
◎ 하이든의 교향곡 제91번·제92번.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드레스덴 국립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협연.
◎ 스트라빈스키의 오라토리오 「오이디프스 왕」. 바이에른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솔리스트로는 소프라노에 제시 노만, 테너에 모저, 바리톤에 지그문트 님스게른이 협연하고 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Bernard Haitink」
매우 경제적인 지휘를 하며 기교를 거의 부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1929년 3월 9일 암스테르담에서 음악을 애호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이팅크가 9세가 되었을 때 그는 갑자기 바이올린 수업을 받고 싶어했고 부모들은 마지못해 그것을 허락했지만 콘서트헤보우의 바이올린 주자 가운데서 한 사람을 그의 스승으로 구해 주었다.
또 그의 집은 연주회장과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그는 직접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많았고, 그것은 그가 커서 지휘자가 될 결심을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끝나자 하이팅크는 암스테르담 음악학교에 등록, 바이올린과 지휘를 배웠지만 학교에서 그는 지휘의 기법에 대해서는 많은 걸 배울 수 없었으며 지휘의 기법은 후에 그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음악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네덜란드 방송관현악단의 뒷자리에 앉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1954년부터 1년간 보내며 당시 유명한 사람들의 다양한 지휘 양식을 관찰, 그 후 네덜란드 방송관현악단의 부지휘자를 거친 다음 1956년 상임지휘자로 임명된다.
1956년은 그에게 행운의 해가 되는데 그것은 1956년 콘서트헤보우와 케루비니의 레퀴엠이 공연되기 전, 줄리니가 병들어 어쩔 수 없이 그 지휘를 하이팅크가 하게 된 것이다. 그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어 그는 정기적인 객원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1959년에는 오이켄 요훔과 함께 공동지휘자로 임명되었고 3년 후에 그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과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1967년 하이팅크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13년간이나 콘서트헤보우의 예술감독과 그 자리를 겸직했으나, 1980년 그런데본 페스티벌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되어 주로 영국에서 「로엔그린」, 「마적」, 「돈 조반니」 등을 공연했지만, 1981∼82년 사이에 「돈 조반니」와 「피델리오」를 가지고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하였다.
하이팅크의 연주곡목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에서 시작하여 베토벤·브라암스·브룩크너·말러·바그너에서 쇼스타코비치로 이어지지만 그는 이른바 전위음악을 지휘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 이유를 우선 그가 그러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누군가가 그것을 비난한다면 그 비난은 청중들의 이해력을 무시한 채 음악을 쓰는 현대음악 작곡가 자신들이라고 말한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의 명반
◎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전집.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쇼스타코비치의 15개 교향곡 전집.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의 2개의 전집판.
◎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8번 「미완성」.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브룩크너의 교향곡 제4번.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브룩크너의 교향곡 제8번.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7번.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브라암스의 피아노 헙주곡 제2번.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협연
◎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협연.
◎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연주. 그라마폰상 수상 레코드이다.
◎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 바이에른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바이에른 국립가극장 합창단 협연. 소프라노 구루베로비가 출연했다.
◎ 베토벤의 5개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의 협연. 이 음반으로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로린 마젤 Lolin Maazel」
조숙한 천재로서의 어린 시절을 보낸 로린 마젤은 러시아 혈통을 받은 미국인의로 1930년 3월 6일 파리 외곽지역에서 출생. 5세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7세 무렵에는 피츠버그에서 지휘를 공부했는데 그는 지휘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9세의 어린 마젤은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함께 지휘 위에 서서 뉴욕 월드 페어의 인터로켄 관현악단과 헐리웃 볼의 로스앤젤레스 필을 지휘했는가 하면 2년 후에는 토스카니니의 초청으로 NBC 오케스트라를 지휘, 그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레비손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하기 연주회에서는 뉴욕 필을 지휘하기도 했다.
마젤은 천재아로서의 지휘자 시절을 보내고 난 후 틴에이저가 되면서 갑자기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 완전히 성숙한 지휘자로 다시 등장하기까지 피츠버그 대학에서 수학과 언어와 철학을 공부했다. 대학시절 그는 지휘자 견습생으로 있었으며 피츠버그의 파인아트 4중주단을 조직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1951년 마젤은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에의해 보스턴 탱글우드에 있는 버크샤 음악센터에 초청되었고, 동시에 이탈리아에서 바로크 음악을 연구할 수 있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유럽에서의 음악경력을 쌓는다.
1960년, 마젤이, 30세 때 그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으로 바이로이트에 데뷔하며 3년 후에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데뷔함으로써 60년대와 70년대에 명성을 날렸던 젊은 지휘자들의 새로운 물결의 선두주자가 된다.
1965년 마젤은 베를린의 도이치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에 베를린 방송관현악단의 지휘자에 임명되어 1975년까지 직무를 수행.
1972년에는 클리블랜드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적자 운명을 면치 못했던 오케스트라를 몇 년만에 흑자로 돌려 놓았고 영국의 데카 및 미국의 CBS와 레코딩하여 그중 데카에서 제작한 거쉰의 「포기와 베스」,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현재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있는 마젤은 프랑스 국립관현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도 취임해 가장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는 지휘자로 꼽히고 있는데, 마젤은 공연 도중 즉석에서 벌어지는 위급한 상태를 가장 민첩하게 간파하여 시정해 내는 지휘자라는 평도 받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해마다 월드 오케스트라(세계 각지에서 선발)의 지휘를 맡기도 한다.
로린 마젤의 명반
◎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연주.
◎ 드볼작의 교향곡 제8번. 비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비인 국립가극장 합창단 협연. 솔리스트에 소프라노 제시노만이 출연했다.
◎ 홀스트의 관현악 조곡 「혹성」. 프랑스 국립오케스트라와 동 여성합창단 연주.
◎ 프로코피에프의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연주.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연주.
◎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전곡.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연주. 남녀 주역에 소프라노 안나 모포, 소프라노 헬렌 도나도, 테너 프랭크 코렐리, 바리톤 피에로 캅푸칠리가 출연했다.
◎ 거쉰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 전곡.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소프라노 테레사 쿠비아크 등이 협연.
◎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 「페트로슈카」. 전자는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후자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체믈린스키의 서정교향곡.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소프라노 율리아바라디가 협연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 Carlos Kleiber」
위대한 지휘자 에리히 를라이버의 아들인 카를로스는 1930년 7월 3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의 아버지가 나치의 예술정책에 대한 간섭에 반대하여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 자리를 내놓고, 방랑함에 따라 외롭고 불안정한 가운데 보내졌다.
그의 가족은 1940년에야 칠레에 정착하여 1948년까지 그곳에서 살게 된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무척 어린 시절부터 드러나 9세에 이미 그는 작곡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음악가의 길을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 카를로스가 취리히의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있으면서도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재능의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화학으로 되돌아온다는 약속 하에 일 년 동안 음악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1950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년 동안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허용 받았고, 1952년에 유럽으로 돌아와 무니히에 있는 게르트너플라츠 극장에 연습지휘자 및 무대 조수로 지원, 2년 후 베를린 근교에 있는 포츠담에서 지휘 데뷔를 하였다. 작품은 칼 밀리커의 오페레타였는데 그는 자기이름으로 지휘하지 않고 「칼 켈러」란 이름으로 지휘하였다.
그 후 비인 민속 오페라 감독인 잘름호퍼 교수 밑에서 무보수 지도원으로 일하다 1956년 아버지인 에리히 클라이버가 갑자기 사망한 후 그의 아버지 대신 도이치 오페라에 기용, 처음에는 연습지도자 노릇을 하다가 1958년 우선 잘츠부르크 주립극장에서 연습 없이 「팔려간 신부」와 「라보엠」을 지휘한 후에야 도이치 오페라에서도 지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는 레퍼토리 극장에서 자주 그러듯이 뒤셀도르프에서도 실제로 연습 한 번을 하지 않고 수많은 작품을 지휘하였다.
1962년 6월에는 「작은 마적」, 「가로등에서의 약혼」, 「성 툴리파탄」으로 이루어진 오펜바하의 작품을 지휘하여 호평 받고, 1963년에는 「호프만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엘레느」를 지휘, 호평을 받았다.
1964년에 클라이버는 스위스의 취리히로 옮겨가서 1966년까지 머무르며 1968년 이래로는 무니히에 있는 바바리안 국립가극장과 객원지휘 계약을 맺고 틈나는 대로 1972년까지 슈투트가르트에서 지휘를 계속했다.
1974년 6월에 클라이버는 바이로이트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 그의 경력에서 가장 뛰어난 승리를 획득했고,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라 스칼라의 200주년 기념시즌인 1977∼78년에 직접 자신이 지휘하기로 계획되었던 이 오페라를 지휘해달라고 그를 초청하였다.
미국에서의 데뷔는 1978년 10월 시카고 공연으로 격찬을 받았다.
클라이버는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서 작품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경우에만 공연에 응하는 완벽주의자로서 대부분의 초청을 경력이나 재정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사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카롤로스 클라이버의 명반
◎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전반적으로 템포가 빠르고 상쾌감이 넘친다는 평.
◎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치밀하고 음악과의 자연스러운 교감이 돋보인다.
◎ 베토벤의 교향곡 제4번.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녹음판으로 투명한 감각이 호평을 받고 있다.
◎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3번과 제8번.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비인 필의 현이 특히 유연하다는 평이며, 제8번 미완성의 경우 무심한 듯 노래하는 듯 하는 연주가 일품.
◎ 브라암스의 교향곡 제4번.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드볼작의 피아노 협주곡.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 연주. 협연에는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스케일이 크고 웅대하다는 평.
◎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전곡. 드레스덴 국립오케스트라와 라이프찌히 방송합창단 연주, 환상미가 넘친다는 이 연주에는 테너 피터 쉬라이어, 베이스 테오 아담, 소프라노 군둘라 야노비츠, 메조소프라노 에디트 마티스가 출연하고 있으며, 이 음반으로 스위스의 몽트뢰 국제레코드상을 수상했다.
◎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동 국립오페라단 연주.
◎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드레스덴 국립오케스트라와 동 국립오페라단 연주. 적재적소의 인물성격이 살아있다는 평을 얻고 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Claudio Abbado」
아바도는 1933년 6월 26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학자이며 베르디 음악원 부교장을 지낸 아버지와 시칠리아 출신 동화작가인 어머니 사이의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마도는 8세 때부터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누나 마리아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는데, 3년 후에는 엔쪼 칼라체에게서 전문적인 피아노 레슨을 받게 된다.
16세가 될 때까지 그는 피아노와 화성학을 기초에서부터 배워 나갔다.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서는 브루노 베티넬리를 만나 그에게서 피아노와 지휘와 작곡을 배웠다. 19세에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하고 그 2년 후에는 지휘과와 작곡과도 졸업한 아바도는 그 해 여름에 시에나에서 열린 「Accdemia Chigiana」의 계절 지휘자 세미나에서 주빈 메타를 만나 강한 자극을 받고 또 오스트리아 비인의 풍부하고 다양한 음악생활에 감동을 받아 비인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기로 결심한다.
비인에 있으면서 점차적으로 아바도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슈베르트와 브라암스의 음악에 친숙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말러와 브룩크너·쇤베르크·베르크·베베른 등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러나 비인에서 아바도가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훌륭한 음악수업은 그 시대의 위대한 지휘자들, 즉 브루노 발터나 오토 클렘페러·요젭 크리프스·칼 뵘·카라얀 같은 사람들이 리허설 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1958년 아바도는 비인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그 해 여름 보스턴의 탱글우드 지휘콩쿠르에 참가하여 지휘자 부문에서 일등상인 「쿠세비츠키」상을 받는다. 그후 그는 미국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이탈리아에서 5년 동안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 뒤 트리스테에서 오페라에 데뷔, 프로코피에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을 연주. 2년 뒤에는 스카를랏티의 탄신 30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는 음악회에서 스칼라좌에 데뷔한다.
결혼으로 인해 생활의 안정이 필요해진 아바도는 파르마 음악학교의 실내악 교수생활을 택하지만, 2년 만인 1963년 그는 어린 시절부터의 꿈인 지휘자의 길을 찾아 뉴욕에 있는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 지휘 코스에 들어간다.
아바도에게 있어 행운은 1965년에야 왔다. 그는 이 해에 베를린 방송관현악단의 지휘를 하게 되었는데, 이를 들은 카라얀은 그를 잘츠부르크 축제에 초청, 거기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파리·런던·부다페스트 등 각지에서 초청이 쇄도하였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성공한 이후인 1968년에 아바도는 「라스칼라」의 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초청되었으며, 1972년에는 지휘자로 임명되어라 스칼라를 이끌어 갔다. 아바도는 라스칼라에 재임하는 동안 라스칼라의 체제를 변화시켜 보다 민주적인 체제로 전환, 극장의 관객을 좀더 넓고 다양한 계층까지 확보하고 특히 노동자와 학생을 위한 특별공연을 기획, 큰 성공을 거둔다.
아바도는 1981년에는 시카고 관현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지명되었으며 그 해에 런던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아바도가 갖고 있는 지휘자로서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아주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전달되는 무한한 에너지와 무한한 정서의 표출이며 뛰어난 단음을 구사하는 것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명반
◎ 롯시니의 오페라 「프랑스의 여행」 전곡. 유럽 연합 오케스트라 연주로, 1984년 이탈리아 페싸로의 롯시니 음악제에서 공연 중 녹음.
◎ 스크리아빈의 교향곡 제4번 「법열의 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로 독일 레코드상
수상 음반.
◎ 베르디의 오페라 합창곡 모음집.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합창단의 연주로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복가네그라」, 「가면무도회」, 「돈 카를로스」 그리고 「레퀴엠」 등의 합창음악들. 오페라 지휘자의 역량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 베토벤의 교향곡 제2번과 제5번 「운명」.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비인 필의 지휘자
입장에서 충실을 유지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 녹음판. 특히 제2번과 제5번이 박진감과 격조가 있다고 평해진다.
◎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5번과 제6번. 유럽 연합 오케스트라 연주로 색채감이 뛰어나다고 함.
◎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6번 「비창」.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바르톡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과 제2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협연. 이 음반은 독일 레코드상과 그라마폰상을 수상했다.
◎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소프라노 캐를네블레트와 알토 마릴린 혼이 솔리스트로 출연했다.
◎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 「불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미세한 음형과 정확한 표현에서 압권으로 알려져 있다.
◎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0번과 제21번.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굴다의 협연. 강렬하면서도 우아하다는 평 .
◎ 브라암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의 협연. 세심하면서도 여유있는 브렌델과 강한 인상의 아바도가 교묘하게 직조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오자와 세이지 Ozawa Seiji」
열렬한 스키광이기도 한 일본인 지휘자 오자와는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인 1935년 9월 1일 만주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 덕택에 그는 어릴 때부터 매주 교회와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어린이 성가대」에서 노래도 부르고 여러 가지 서양악기 , 즉 아코디언·하모니카·오르간 그리고 피아노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패망하자 그의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그는 처음으로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가난을 맛보게 되며 음악을 배우고 싶은 욕망과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큰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전력을 경주한 노력으로 일본으로 이사온 직후 곧바로 피아노 수업을 시작했고, 12세 때에는 바하의 피아노나 쳄발로 음악의 전문가로 알려진 도요마슈 교수 밑에서 그의 권유로 작곡공부도 하였다.
15세 때에는 토호 음악학교에 등록해 독일에서 공부한 히데오 사이토 교수에게 사사, 그의 권유로 지휘공부를 시작. 토호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그의 여자친구가 공부하고 있는 파리로 가서 그녀와 결혼, 그 해에 그는 브장송 지휘자 콩쿠르에 참가, 그 경연대회에서 지방 방송관현악단을 지휘하며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과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포레의 「돌리모음곡」 그리고 드볼작의 「신세계 교향곡」 중에서 몇 악장, 또 그 대회를 위해 특별히 위촉되어 새롭게 작곡된 작품을 지휘하여 1등상을 탔다.
그 이후 계속 행운이 따라 브장송 지휘자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던 보스턴 관현악단의 지휘자인 샤를르 뮌시가 보스턴의 탱글우드에서 열리는 지휘자 경연대회에 오자와를 초청한다. 그곳에서 그는 아바도나 메타 그리고 마젤과 같은 인물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며 드뷔시의 「바다」의 마지막 악장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비올라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협주곡」과 현대음악을 연주하여 쿠세비츠키상을 받고 레너드 번스타인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60년 그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임명받고 그 전의 8개월간은 베를린으로 가서 카라얀의 지휘학교에서 학생의 자격으로 카라얀의 지도를 받았다. 1963년에는 토론토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임명, 6년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1970년에는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3년 후에는 보스턴 심포니의 음악감독직을 맡아 화려하고 완벽하게 이해된 선율로 청중들을 사로잡는 일을 계속해 오고 있다.
오자와 세이지의 명반
◎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동 합창단 연주.
◎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제2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협연. 이 음반으로 프랑스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6번 「비창」. 파리 오케스트라 연주.
◎ 드볼작의 교향곡 제7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 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로 말러의 제8번 「천인의 교향곡」과 함께 투명감과 세련된 표현으로 정평이 나왔다.
◎ 메시앙의 뚜랑갈리아 교향곡.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로 메시앙의 육감적 색채가 뛰어나다는 평.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쇤베르크의 나레이터·합창·오케스트라를 위한 「구레의 노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오자와 연주 중 최고 명반으로 평가, 설득력이 강한 연주라고 함.
◎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불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파리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레코드도 출반되었으나 보스턴과의 연주가 낫다는 평.
◎ 칼 오르프의 극적 칸타타 「카르미나브라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34세 약관의 나이에 레코딩한 오자와의 패기만만한 청춘의 기록임.
◎ 알반 베르크·스트라빈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바이올리 니스트 이차크 펄만 협연. 이 음반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스토리」.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주빈 메타 Zubin Metah」
오자와 세이지와 함께 동양인으로서 미국 지휘계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주빈 메타. 1936년 4월 29일 인도의 봄베이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8세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16세에 봄베이 심포니를 지휘했던 그는 18세에 비인 국립아카데미로 진학해 한스 스바로프스키에서 지휘법을 공부했으며, 19세의 나이에 영국 리버풀 지휘경연대회에 출전해 우승했다. 이때부터 그는 세계 악단의 객원지휘를 시작했으며, 25세 이전에 이미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를 7군데나 지휘했다.
비인 국립아카데미를 마치고 1961년 캐나다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거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14년간이나 재직했던 그는, 78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제 최정상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뉴욕 필은 69년 번스타인이 물러난 후 조지 셀이 잠시 이끌어가다가 71년 피에르 불레즈를 상임지휘자로 맞아들였으나 그 역시 창작에 전념하겠다고 훌쩍 떠나 급기야는 78년 주빈 메타를 상임지휘자로 맞았다. 이러는 와중에서 뉴욕 필은 그 화려한 명성을 다소 잃고 있었으나 섬세하면서도 스케일이 크다는 주빈 메타를 맞아들여 세계 3대 오케스트라의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음악보다는 그 전의 음악들, 특히 후기 낭만 음악에 특출하다는 주빈 메타는 브룩크너·말러·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장기를 보이고 있으며, 바그너 음악을 좋아한다. 당당한 스케일과 부드러운 울림을 동시에 표현하는 그는 현재 뉴욕 필 외에도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지휘자를 맡고 있으며, 1년에 12주 정도는 비인·파리·베를린·런던·밀라노 등지에서 객원지휘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주빈 메타의 명반
◎ 베토벤의 5개 피아노 협주곡 전집.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협연.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 수상 레코드.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프리지나 협연. 이 음반으로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 수상.
◎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에밀 길레스 협연.
◎ 브라암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협연.
◎ 베토벤의 5개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와의 협연.
◎ 브라암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의 혈연.
◎ 브라암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아르튀르 루빈스타인의 협연.
◎ 베르디의 레퀴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솔리스트로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가 출연했다.
◎ 말러의 교향곡 제1번 「거인교향곡」.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블로호의 「셀로모」, 「황야의 목소리」.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브룩크너의 교향곡 제8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생상스의 교향곡 제3번 「오르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오르가니스트 프리스트의 협연.
◎ 브룩크너의 종교음악 「테 데움」.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림스키 콜사코프의 관현악곡 「세헤라자데」.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푸치니의 오페라 「서부의 딸」.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남녀 주역에는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소프라노 네블릿 등이 출연했다.
◎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남녀 주역에는 프테너 프랭코 코렐리, 소프라노 비르기트 닐슨 등이 출연했다.
「리카르도 무티 Ricard◎ Muti」
그 자신 스스로 100 퍼센트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라고 말하는 리카르도 무티는 1941년 6월 28일 음악의 도시 나폴리에서 대단한 음악 애호가인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무티의 뛰어 난 음감을 간파한 아버지의 권유로 8세 때부터 바이올린 수업을 받았고, 4년 후에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는데 자기자신이 재능이 있다고 여겨지자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꿈을 갖고 매일 아침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음악학교를 다니는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무티가 다닌 음악학교의 교장은 도니제터였고 그의 피아노 스승은 빈첸쪼 비탈레로서 그가 나폴리 음악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무티 자신이 고백한 바 있다. 1960년까지만 해도 무티는 지휘자의 꿈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그 해 학생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가 와서 지휘의 경험을 얻자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지휘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는 전문적인 지휘자가 될 결심을 하고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 안토니노 보토로부터는 지휘를, 브루노 벨리니로부터는 성악에 대한 전문지식과 작곡을 배웠다.
이탈리아에서 작곡을 공부하는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서는 보통 10년이 걸리는데 이 과정을 5년만에 끝내는 한편 베르디 음악원의 마리아 카르보네의 성악 클래스에서 크리스티나 마짜빌라니라는 아름다운 메조 소프라노를 만나 결혼. 1966년 무티는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하고 1967년에는 귀도 칸텔리 지휘콩쿠르에 도전하여 1등을 차지, 비토리오 구이의 호감을 사 솔로 연주자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의 협연으로 그 도시의 시 공관에서 지휘를 하게 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69년부터 무티는 그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고 유진 오먼디의 눈에 띄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직까지 겸하게 된다.
1972년 무티는 처음으로 베토벤의 「헌당식」 서곡, 브라암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등의 프로그램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는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1973년부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6년 후 무티는 이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으나, 1982년 7월, 그는 음악감독과 상임지휘자의 자리를 그만두고 그 해 9월부터 「계관지휘자」라는 칭호를 받는다.
무티는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을 객원지휘하지만 그는 무엇을 어디에서 공연해야 할지, 자기가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정리해 갖고 있다. 즉, 베를린 필과는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이르는 독일 작곡가의 연주곡목을 지휘하고, 비인 필과는 모차르트를 지휘하지만 무티가 모든 오케스트라 중에서 가장 다기다예한 오케스트라라고 믿고 있는 런던 필하모니와는 자기의 모든 오페라 공연을 레코드로 출반하였다. 그는 언젠가는 베르디 오페라의 모든 작품을 레코드로 녹음하고 싶어하며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대에 자기자신의 사운드를 오케스트라에 각인 시켜 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리카르도 무티의 명반
◎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 남녀 주역에는 테너에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에 피에로 캅푸칠리, 베이스에 니콜라이 갸로프, 소프라노에 몽세라 카바예 , 메조 소프라노에 피오렌짜 코놋토가 출연했다.
◎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앰브로지언 오페라 합창단 연주. 테너에 베리아노 루켓티, 베이스에 니콜라이 갸로프, 소프라노에 레나타스코토, 메조 소프라노에 오브라스조아가 출연했다.
◎ 베르디의 오페라 「에르나니」. 스칼라 가극장 합창단과 동 오케스트라 연주. 테너에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에 레나토브루존, 베이스에 니콜라이 갸로프, 소프라노에 미렐라 프레니가 출연했다.
◎ 롯시니의 서곡집.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세빌리아의 이발사」, 「윌리엄 텔」 서곡 등 6곡이 수록되어 있다.
◎ 롯시니의 종교음악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 피렌체 오월음악제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솔리스트로 알토 아그네스 발차 등이 출연했다.
◎ 레스피기의 관헌악곡 로마의 3부작인「로마의 분수」, 「로마의 축제」, 「로마의 소나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
◎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
◎ 칼 오르프의 극적 칸타타 「카르미나브라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
◎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협연. 이 음반으로 프랑스의 레코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 베를리오즈의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웨스트민스터 합창단 연주 솔리스트로는 소프라노 제시 노만, 테너 에이라, 베이스 에스데스 등이 출연했다.
「다니엘 바렌보임 Daniel Barenboim」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1942년 11월 1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유태계 우크라이나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피아노 교사로서, 특히 그의 아버지 앙리끄는 바렌보임이 5세 때부터 아들의 음악교육을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지도, 7세에 데뷔시킴으로써 「잘츠부르크의 신동」이라는 칭송을 듣게 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바렌보임이 9세 때 그의 가족은 유럽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그는 잘츠부르크의 모짜르테움에 유학하고 그 이듬해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바하의 「D단조 협주곡」을 연주하는 한편 학생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브라암스의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해서 음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에드윈 피셔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엔리코 마이나르디에게서 실내악을 공부했고, 이고르 마르케비치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그후 그의 가족은 이스라엘로 돌아가 조국에 영주했지만 그는 다시 잘츠부르크로 와서 이스라엘 정부가 주는 장학금으로 파리와 로마로 유학, 파리에서는 나디아 불랑제에게서 작곡을 공부했고,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는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배워 이 학교 역사상 최연소 졸업생이 되었다.
바렌보임은 13세 때 모차르트 200주기 페스티벌 홀에서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함으로써 영국 데뷔를 한 동시에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이 연주회 이후 즉각 그는 미국 매니저인 솔 휴록과 계약하고 이듬해엔 카네기홀에서 스토코프스키 지휘로 미국에 데뷔.
이미 15세에 바렌보임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며 22세에는 평론가들로부터 피아노의 대가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지휘자의 길로 들어서 현대의 지휘자 중 가장 센시티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대다수의 비평가들은 그가 앞으로는 피아니스트보다는 지휘자로서 더 기억될 것이라고까지 예언하고 있다.
그는 1967년 세계적 첼리스트인 자클린느 뒤 프레와 결혼하여 최고의 음악가 부부로서의 명성을 날렸지만 뒤 프레가 하반신 불구가 됨으로써 첼로를 그만두게 되고 결국 이혼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뒤 프레는 지난 86년 사망). 피아니스트로서의 바헨보임은 레퍼토리가 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전곡,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바이올린 소나타 전집」 그리고 쇼팽과 브라암스 정도에 국한되어 있어 그의 음악에 대한 즉흥성 때문에 훈련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지휘자로서의 바렌보임은 1962년 이스라엘에서 데뷔한 이래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베를린 필하모닉·뉴욕 필하모닉·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더불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바하와 비인파 고전을 비롯해서 프랑스의 음악·브룩크너·차이코프스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엘가에 대한 그의 해석은 특출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1975년이래 그는 파리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다니엘 바렌보임의 명반
◎ 모차르트의 레퀴엠.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의 연주.
◎ 베토벤의 5개 피아노 협주곡 전집.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바렌보임 자신이 피아노 협연을 했다.
◎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베를리오즈의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파리 오케스트라의 연주.
◎ 베를리오즈의 레퀴엠. 파리 오케스트라의 연주.
◎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4번.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드볼작의 첼로 협주곡.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첼리스트 자크리느 뒤 프레의 협연.
◎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파리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아차크 펄만의 협연. 이 음반으로 프랑스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 포레의 레퀴엠. 파리 오케스트라와 에딘버러 음악제 합창단 연주, 바리톤 피셔-디스카우가 솔리스트로 협연했다.
◎ 라벨의 관현악곡 「볼레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라 발스」, 「다프니스와 클로에」. 파리 오케스트라의 연주.
◎ 팔랴의 교향적 인상음악, 「스페인 정원의 밤」. 파리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게르히의 협연.
◎ J.S. 바하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제2번.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아차크 펄만·핀커스 주커만이 협연했으며, 프랑스 디스크 대상 수상했다.
◎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아르튀르 루빈스타인의 협연. 이 음반으로 프랑스 레코드 아카데미상과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 북케리니의 첼로 협주곡.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와 첼리스트 자크리느 뒤프레의 협연. 이 음반으로 프랑스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제임스 레바인 James Levine」
33세에 불과한 나이로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음악감독직을 따낸 메트로폴리탄의 거장 제 임스 레바친은 1943년 6월 23일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한때 바이올린 주자였던 아버지와 여배우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미한 말더듬의 치료법으로 의사의 조언을 받아 피아노 수업을 받았으며, 그러나 놀랄 만큼 쉽게 빨리 배웠고 9세 때에는 집에서 작은 꼭두각시 극장과 전축의 보조로 오페라를 제작하고, 노래하고, 지휘하고 감독했으며 10세 때에는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피아니스트로서 정식 데뷔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반학교를 다녔고 오후에만 매일 2시간씩 음악공부와 피아노 연습을 했다. 13세 때 그는 루돌프 제르킨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말보로 음악축제에 갔던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즉흥적으로 무대 뒤쪽에서 합창을 지휘해 줄 것을 부탁 받아 지휘를 한 다음부터 그는 자신이 장래 지휘자가 될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레바인은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진학, 로지나 레빈에게서 피아노를, 장 모델로부터는 지휘를 배웠다. 20세 때에는 포드 재단이 후원하는 미국 지휘자를 위한 사업계획의 일환으로 오디션을 받았는데 그 오디션의 심사위원이었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조지 셀로부터 최종 결정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레바인은 그의 조수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당장 수락, 6년 동안 조지 셀에게서 고전 양식과 고전적 구조, 고전 분야와 고전 훈련에 대해 배운 뒤 1970년부터 국내외 오페라의 지휘를 맡게 된다.
1971년 레바인은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토스카」와 「루이자 밀러」를 지휘했는데 이때의 대단한 성공으로 이 가극장의 총 집행관이었던 괴란 겐텔레로부터 그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수석지휘자의 자리에 임명되고 1974년에는 음악감독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이때 메트로폴리탄은 그 역사상 가장 힘든 재정적 위기와 예술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레바인은 3년 이내에 헌신과 노력으로 일관한 임무수행으로 메트로폴리탄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난 30년 동안의 어느 때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레바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메트로폴리탄에서 보내고 있지만 잘츠부르크 음악축제에 정기적으로 참가하고 라 스칼라나 비인 국립가극장, 코벤트 가든으로부터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몇몇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와의 제한된 객원지휘 외에는 다른 어떤 곳의 오페라도 지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라비니아 여름음악축제와 시카고 심포니의 여름시즌 음악축제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레바인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며 실제 공연을 음반으로 담기를 무척 애호하여 언젠가는 자신의 음반 전부가 실제 공연을 담은 것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제임스 레바인의 명반
◎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28번·제33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
◎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생상스의 교향곡 제3번 「오르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3번. 시카고 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 여성창에 소프라노 마릴린 혼 협연.
◎ 말러의 교향곡 제5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
◎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제13번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무지크」.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 전곡.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비인 국립가극장 합창단 연주. 남녀 주역에는 소프라노 일레아나 코루트바스, 바리톤 마르티 탈베라, 바리톤 호세 판 담 등이 출연.
◎ 베르디의 오페라 「오델로」 전곡. 내셔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앰브로지언 오페라 합창단 연주. 남녀 주역에는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 세릴 밀른즈,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 등이 출연 .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전곡.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비인 국립가극장 합창단 연주. 남녀 주역에는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 소프라노 안나 토모와-신토우, 알토 아그네스 발차 등이 출연.
e 칼 오르프의 극적 칸타타 「카르미나브라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쥬세페 시노폴리 Giuseppe Sinopoli」
아바도와 무티와 더불어 이탈리아 출신의 당대 3대 지휘자로 꼽히는 시노폴리. 1946년 12월 1일 베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12세부터 음악공부를 시작했으나 대학에서는 의학(신경외과) 공부를 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베니스의 베네데토 마르첼로 음악원에 입학해 작곡과 지휘공부를 했다.
1972년 베니스 음악원의 현대음악과 전자음악 교수로 임명된 시노폴리는 이때부터 비인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 교수에게 정식으로 지휘법을 사사 받기 시작했고, 77년에는 파리 고등음악원에 수학하면서 지휘공부를 했다.
시노폴리가 지휘자로서 입신하기 시작한 것은 73년 시에나 국제음악제에서 지휘를 하면서부터. 그후 78년 베니스의 테아트로 라 페니세 무대에서 「아이다」를 성공적으로 연주함으로써 세계 지휘계의 주목을 받았다. 80년에는 독일 무대로 진출해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연주로 베르디의「멕베드」를 지휘해 크게 호평을 받았으며, 이어서 함부르크 오페라에서 「아이다」를, 비인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아틸라」를 성공적으로 연주했다.
이처럼 음악의 정통적 본고장인 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 무대를 석권한 그는 83년 영국의 코벤트 가든 오페라 하우스에서 「마농레스코」를, 그리고 미국으로 진출해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토스카」를 지휘해 세계 지휘제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자리를 굳혀 놓았다.
85년에는, 오페라 지휘자라면 한 번쯤 그 무대를 꿈꾸는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서 오프닝 공연 「탄호이저」를 성공적으로 지휘해 유럽 악단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다음 세대의 지휘자로 가장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의학박사이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고있는 그는 작곡가로서의 활동도 두드러지고 있다. 이미 70년부터 각 음악제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고 있는 그는 76년에 독일의 다름쉬타트 현대음악제 마스터 클래스에서 작곡을 가르쳤으며, 81년에는 뮌헨의 바바리안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의 작품「살로메」가 초연 되어 호평을 받아 작곡가로서의 위치도 단단히 다져 놓았다.
현재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맡고 있는 그는, 세계 3대 교향악단으로 불리는 베를린 필·비인 필·뉴욕 필의 객원지휘도 활발하게 하며 오페라 레코딩도 쉬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출신인 만큼 아무래도 그의 장기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우선일 것 같다.
쥬세페 시노폴리의 명반
◎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꼬」 전곡.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소프라노 디미트로바, 바리톤 피에로 캅푸칠리가 출연하고 있다.
◎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 전곡.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테너 호세 카레라스, 바리톤 레나토 브루존이 출연 .
◎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전곡. 로마 세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바리톤 레나토 브루존, 소프라노 구르베로바 출연.
◎ 푸치니의 오페라 「마농레스코」 전곡. 필하모니 아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출연하고 있다.
◎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8번 「미완성」.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
◎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
◎ 슈만의 교향곡 제2번. 비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 메조 소프라노 브리기테 파스벤다가 솔리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제2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게르히가 협연하고 있다.
◎ 브라암스의 도이치 레퀴엠.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솔리스트로 테너에 르네 콜로, 소프라노에 루치아 폽이 출연하고 있다.
「리카르도 샤이 Riccardo Chaiily」
작곡가 루치아노 샤이의 아들로 1953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음악공부를 하였으나, 그 재능을 의심한 부친은 그를 로마에 있는 공업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샤이는 이곳에서 학과 공부에는 열중하지 않고 음악에만 몰두해, 결국 샤이는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으로 옮겨 피아노 공부를 한다. 베르디 음악원을 마친 샤이는 다시 이 음악원의 지휘과에 입학해 지휘를 공부했다.
샤이의 첫 지휘는 1968년에 트렌티노에서 팝 그룹의 타악기 주자들로 구성된 악단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7세의 나이 때는 뮤지컬 아프터눈즈라고 불리는 신극장 Teatro Nuovo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지휘봉을 들기도 했다.
1970년에는 라 스칼라에서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도우며 부지휘자를 맡았고, 이곳에서 그는 지휘자로서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열광적이고 교육적인 시간을 가졌다. 브라암스와 모차르트는 물론 라벨과 드뷔시 같은 인상파 음악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웠고,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일하는 방법, 오페라 지휘의 기술 등을 익혀나가기 시작한 그는 72년에 밀라노에서 오페라 지휘로 성공했고, 74년에는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 무대에서 「나비부인」으로 해외 데뷔를 성공시켰다.
76년에 다시 시카고 무대에서 「리골레토」 성공을 거두고 78년에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팔리아치」를 이탈리아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둔다. 이어서 80년 봄에는 라 스칼라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을 지휘했고, 런던 심포니와 함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82년에 샤이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RIAS의 음악감독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명된다.
샤이가 특히 영국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만큼 레코드도 영국의 데카와 독점계약을 맺고 있다. 롯시니의 「월리엄 텔」 서곡이 그의 첫 레코드이며, 바그너의 악극을 그의 최후의 지휘 레퍼토리로 꿈꾸면서 실력을 쌓고 있다. 89년에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의 계약이 끝나는 동시에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갈 예정.
리카르도 샤이의 명반
◎ 칼 오르프의 극적 칸타타 「카르미나브라나」. 베를린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RIAS(베를린 방송 심포니) 실내 합창단연주.
◎ 프로코피에프의 칸타타 「알렉산도르녜프스키」. 클리블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동 합창단 연주. 소프라노 마티나 아로요가 솔리스트로 참여했다.
◎ 브룩크너의 교향곡 제7번. 베를린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 클리블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라벨의 「볼레로」, 무소르그스키-라벨의 「전람회의 그림」.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 베토벤의 미사 C장조. 베를린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RIAS 실내합창단 연주에 메조 소프라노 미뇽 던이 솔리스트로 협연했다.
◎ 베르디의 오페라 「멕베드」. 볼료냐 시립가극장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 연주. 남녀 주역에는 테너 베리아노 루켓티, 소프라노 셜리 버렛트가 협연했다.
◎ 브라암스의 교향곡 제1번.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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