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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글과 음악

체리향기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by 김귀자 2011. 1. 7.

터키 사람 하나가 의사를 만나러갔어요.
그리곤 말하길,
손가락으로 내 몸을 만지면 몹시 아파요.
머리를 만져도 아프고,
다리를 만져도 아프고,

배를 만져도, 손을 만져도 아파요.
의사는 자세히 진찰 한 후 이렇게 말했어요.
젊은이 몸은 괜찮은데 손가락이 부러졌군요.
이봐요 젊은이 자넨 마음이 병들었어요.
다른 덴 문제가 없어요. 생각을 바꿔봐요.

황색언덕, 띄엄띄엄 떠있는 구름과 희미한 하늘, 색 바랜 카키빛 마른 나무. 그림속 지그재그 길을 따라 한 남자가 자살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러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차를 몰고 가고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바디.

그는 지나치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며 자신의 차에 동승할 사람을 찾는다.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수면제를 먹고 두번 자기의 이름을 부르고 대답이 없으면 누운 자신의 위로 흙을 덮어 줄 사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는 그의 간절한 부탁에도 사람들은 고개를 젓는다.

애띤 얼굴의 군인도, 온화한 미소의 신학도도 죽음이란 단어 앞에선 단호하게 외면할 뿐. 드디어 한 노인이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박물관에서 박제를 만드는 노인은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자살을 시도하다가 달콤한 오디 열매 때문에 마음을 돌린 자신의 작지만 소중한, 삶의 기쁨들을 하나씩 펼쳐 놓는다.

어느 날 아침 새벽동이 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실었어요.
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 먹었죠. 난 미아네를 향해 출발했어요.
난 체리 나무 농장에 도착했어요. 그 곳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해가 뜨지 않았죠.
난 나무에 밧줄을 던졌지만 걸리지가 않았어요. 계속해서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난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단단히 동여 맸어요. 그 때 내 손에 뭔가 부드러운 게 만져졌어요. 체리였죠.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요.

전 그걸 하나 먹었죠. 무심결에 먹어 보니 너무도 달더군. 그리곤 두 개, 세 개를 먹었어요. 그 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올랐어요.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죠. 그리곤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 애들은 가다 말고 서서 날 쳐다보더니 나무를 흔들어 달라고 했어요.
체리가 떨어지자 애들이 주워 먹었죠. 전 행복감을 느꼈죠.
그래서 아이들에게 체리를 따서 던져 주고 나무를 내려왔소.

이른 아침 붉은 태양이 물드는 하늘을 본 적이 있소?
보름달 뜬 밤의 고요함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소?
누구의 삶이나 문제가 있게 마련이지. 하지만 생각해봐요, 삶의 즐거움을,
막 떠오르는 태양의 아름다움을. 맑은 샘물의 청량함 그리고 달콤한 체리의 향기를...

죽으면 체리향기도 맡을 수 없다는 노인의 말에 바디는 새삼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낀다.  운동장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도시의 하늘 너머 펼쳐지는 저녁노을의 눈부신 빛깔.
밤이 오자 바디는 수면제를 먹고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 눕는다.  푸른 달빛이 서리고 조금은 긴장된 그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사방은 온통 어둠뿐. 가끔씩 치는 번개의 빛에 그의 얼굴이 이따끔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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