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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글과 음악

슬픔의 가치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by 김귀자 2011. 1. 7.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경험할 시간을 가지라. 친구들이 돕게 놔두고 도와준다는 제안을 거절하지 말라. 잠시 시간을 가지라. 누군가 안부를 물을 때 자동적으로 '좋아'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대신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 날 확인해줘서 고마워' 라거나 '도움이 필요한데 어떻게 부탁해야 할지를 모르겠어'라고 답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지금은 괜찮은데 , 한달 후에 다시 날 체크 좀 해줘'라고 말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도움과 지지와 사랑을 받도록 그대로 두라. 친구나 가족의 도움도 허락하라.
물론 원한다면 언제든 그리고 어디서든 울어라

상실의 고통은 너무나 강렬해서 가슴이 터질듯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므로 인간은 다른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고, 슬픔은 잃어버린 그 연결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슬픔을 철회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회피하길 원하는 것은 상실의 고통이다. 슬픔은 궁극적으로 고통 속에 있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치료 과정이다. 그 고통과 사랑은 영원히 연결되어 있다. 상실의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함께 나누었던 사랑과 삶을 피해야 한다.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다. 죽음 이후 밀려드는 엄청난 상실감을 이겨내기 위해 곧바로 부정의 단계로 들어간다. '믿을 수가 없어' 또는 '설마 나한테' 같은 반응은 상실에 대처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것은 슬픔 속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이해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슬픔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데 꼭 필요한 단계이다.

죽음은 불시에 찾아온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는 경험은 결코 준비된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사랑한 이와 함께 살았던 이 세계와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영혼의 세계를 분리시키는 가슴 찢어지는 하나의 금인 셈이다.

100년전에는 사람의 임종을 앞두고 모두가 모였으며 마을에 종이 울렸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명복을 빌었다. 서로가 다 아는 사이였다.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모든 마을 사람이 굳이 묻지도 않고 애도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죽음을 부인하고,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낯선 세계에 살고 있다.  미국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잘 죽을수도 없고, 잘 애도할 수 없다. 1940년대부터 병은 병원으로, 죽음은 장례식장으로 옮겨갔다.  

이제 우리는 낯선 사람들 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때 좀처럼 가족이 모이지 않는다. 가족이 다 모여도 병원은 교대 방문을  요구하며 아이들은 병문안 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젊은 의사는 알약을 주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는 생산성만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대부분 회사에서는 경조 휴가로 3-5일을 준다. '필요한만큼 시간을 쓰세요. 매우 힘든 시기죠'라고 말하는 회사는 거의 없다.
직장에서는 보통 일년에 한번의 죽음만을 허락한다. 경조 휴가가 끝나면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빨리 끝을 맺고 빨리 회복하길 강요한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같은 기간 슬퍼하길 기대한다.

그러나 영원히 슬퍼할 거라는 것이 현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극복할 수 없으며, 그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것이다. 치유가 될 것이고,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어서도 안된다.

슬픔의 힘은 희한하게도 슬픔을 치료하는 자체 효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상실의 고통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탄생과 죽음의 주기를 완전히 따르므로 삶을 충만하게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상실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슬픔과 애도의 힘이 우리를 치유하고 잃었던 그 사람과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슬픔의 은총이며, 슬픔의 기적이다.
그것이 슬픔의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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