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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음악사랑

클라라 하스킬

by 김귀자 2010. 8. 9.
1895년 루마니아 태생의 유태인
5살에 아버지를 잃는다
6살 때 악보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단 한번 들은 모짜르트 소나타를 그 자리에서 재현하고 악장 전체를 다른 조로 바꾸어서 연주
브람스 협주곡을 단 이틀 만에 오케스트라 총보를 포함한 악보 전체를 암기해서 무대에 서고 리스트 협주곡을 단 하루만에 암보했다던 천재소녀
15세 때 파리음악원 수석 졸업
청순하고 고혹적인 빼어난 미모

모든 면에서 완벽함을 갖추었던 클라라 하스킬의 어린시절 이야기다.
그러나 한참 피아노의 전성기를 보내던 18세에 ‘세포경화증’(Sclerosis)이라는, 뼈와 근육이 붙거나 세포끼리 붙어 버리는 불치의 병으로 인해 20대에 그녀의 외모는 저주에 걸린 공주처럼 곱추가 되어버린 채 반백의 노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차라리 마법에 걸려 그렇게 되었으면 다시 돌아올수나 있었을텐데...
그 후 4년간 몸에 깁스를 댄 채 살아가게 되면서 연주뿐 아니라 정상적인 생활까지 포기하게 된다. 23살에는 그동안 최고의 후원자며 지원자였던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잃게된다. 이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며 가족도 없이 침대에 누운 채 혼자 포성을 들으며 청춘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놀라운 의지력으로 병과 싸워 불구의 몸을 마침내 일으켜세우고 마는 하스킬.
곧 죽을 것만 같던 그녀가 일어나다니...죽음을 뛰어넘는 엄청난 집념이 느껴진다.
그녀는 결국 콘서트홀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무서운 의지로 연주회장에 선 그녀의 연주를 들으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겨우 암흑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려는 그녀 앞에 다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유대인이었던 그녀는 나치 때문에 독일군을 피해 남프랑스 마르세유로 피신하게 되는데 전쟁의 공포와 성치않는 몸을 이끌고 탈출했던 그녀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다시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만다. 결국 뇌와 척수에 종양까지 발생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렸을 것 같은 상황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의 열렬한 음악팬이었던 유대인 의사가 그 소식을 듣고 남프랑스 마르세유까지 달려와 대 수술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긴 수술끝에 마침내 그녀는 다시 살아나게 된다.
2차대전 내내 공포와 절망 그리고 좌절 속에서 지내야 했던 그녀 곁에 남아있는 것은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쉰 살의 외모는 70대 할머니의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고 바이올리니스트 그뤼미오와 함께 녹음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되며 이 때 녹음한 것은 모두 명반이 된다.
하스킬과 그뤼미오는 무려 26년의 차이가 있지만 서로의 음악을 인정해주며 함께 많은 연주여행을 하게된다. 이 때가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1960년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콘서트에서 하스킬은 그녀의 인생에서 마지막 연주를 하게 된다.
콘서트 실황을 녹음하게 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이날 연주에서 그녀는 자신의 꺼져가는 마지막 숨결을 모두 불어넣는다.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과 육체적 고통을 생각한다면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연주가 아닐까!
연주가 끝난 지 3개월 후인 12월 그녀는 바이올리니스트 그뤼미오와의 연주를 위해 브뤼셀 역에 도착해 계단을 내려가던 중 현기증으로 쓰러지고 만다.
브뤼셀 병원에 실려가게된 후 의식불명에서 겨우 깨어났을때 '내일 연주는 못하게 될 것 같구나. 그뤼미오씨께 죄송하다고 전해주렴' 하고 동생에게 했던 말이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나이가 66세
'청소부나 되었어야 할 인생이다. 청소하는 것 말고는 할줄 아는게 없다." 라고 말했던 그녀
무척 겸손했고 수줍음이 많았으며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었던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남겼던 한마디는
“나는 항상 벼랑의 모서리에 서 있었어요. 그러나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인해 한 번도 벼랑 속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 피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요,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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