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말기암을 선고받고 엄마는 한국으로 나오셨다. 3개월 시한부를 넘기며 엄마는 기적같이 1년을 버티고 계시다. 늘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지금까지 엄마에게 받기만 하며 자라난 우리들은 서로를 챙길 줄도 모르며 자라왔다.
성장해서는 결혼하고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살게 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살아가기 보다는 사는 게 바빠 소원하게 살았던 우리다.
하지만 아파하시는 엄마를 위해 서울, 경기도, 대구, 부산, 창원,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엄마의 상태를 하루하루를 공유하면서 같은 시간에 각자의 지역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당번을 정해 각자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모시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엄마가 드실 수 있는 음식을 찾아다녔고 약해진 근육이 회복될 수 있도록 운동을 도와드렸다. 몇 키로를 걸으셔도 별 힘든 기색없이 절 걸으셨던 엄마가 1년을 넘기면서부터 점차로 걷기를 힘들어하시더니 이젠 걸으실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집에서는 더 이상 간호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고 나니 병실이 따뜻하고 아늑하다.
온 몸을 스스로 움직이실 수 없는 엄마를 위해 두명의 요양보호사님들이 2,3시간 간격으로 들어오셔서 기저귀도 갈아주시고 체위를 해주시러 오신다.
간호사, 의사,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까지 병실로 들어와 끊임없이 엄마의 상태를 살피며 필요한 조치를 할 뿐 아니라, 보호자를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성모병원이라 수녀님들이 오셔서 수시로 엄마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셨고 자원봉사자들은 혈액순환이 안 되는 엄마를 위해 발마사지를 해주시러 오셨다.
기저귀를 갈아주시는 요양보호사나 엄마 목욕을 시켜주시러 오시는 분들 역시 모두 너무나 친절하다.
너무나 감사해서 엄마병실로 들어오시는 분들에게 삶아간 계란과 과일, 편의점에서 사온 커피로 마음을 표시했다.
그 어떤 병원에서도 이렇게 친절하고 인격적으로 잘 대해주긴 힘들 것 같다.
그렇다보니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오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입원기간이 두 달을 넘길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엄마의 입원이 벌써 1달하고 3주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일주일 후면 이 위독한 상태에서 엄마는 다른 병원으로 옮기셔야만 한다.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이 시간을 위해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주여, 사랑하는 저의 어머니를 지켜주세요. 더 이상의 고통은 이제 멈춰주시고 이 병원에서 평안하게 눈을 감으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엄마의 증세가 임파선까지 전이되어 말씀을 못하시는 상황이 왔지만 표정과 눈빛으로는 우리의 이야기에 반응을 하신다.
두 달 동안 우리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엄마께 얼마나 감사하고 사랑하는지 그리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쉴 새 없이 전했다.
간간이 옆방에서 진통으로 아픔을 호소하는 큰 소리가 들려온다.
불안한 듯 눈을 뜨고 동공이 흔들리며 천정을 응시하는 엄마에게 속삭이며 손을 잡고 성경말씀을 읽어드렸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을 너를 붙들어주리라”
“엄마, 저희가 여기에 있어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엄마의 오른손을 잡아주고 계시니 두려워마세요.”
거칠었던 호흡은 서서히 안정되어가면서 엄마는 푸~하며 잠이 드신다. 그러다 다시 눈을뜨고 허공을 바라보며 표정이 아픔으로 일그러지시는 엄마를 보고 간호사에게 달려가 봐달라고 하니 병실로 와서 확인한 후 진통이 맞다고 하며, 진통제를 투여해주고 나간다.
우리는 각자의 당번주마다 엄마의 옆에서 끊임없이 팔과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드실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다행히 엄마는 진통제를 하루나 이틀에 한번정도 맞으실 정도로 잘 주무셨고 평안을 유지하셨다.
병원에서는 엄마처럼 말기암환자가 이렇게 평안하게 계시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2주전 내가 간호할 때만 해도 국물은 드실 수 있었는데 이번 주는 더 이상 약도, 물도 드실 수 없는 상태라고 전해왔다.
엄마의 고통을 보면서 우리들은 기도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3월 19일 06시가 되었다.
며칠간 잠 못들다 모처럼 푹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를 케어하고 있는 동생으로부터였다.
“언니, 엄마가 산소마스크 끼시고도 호흡을 힘들어 하셔. 언니 코로나검사를 자가키트를 해서라도 지금 빨리 와야 할 것 같아. 어서와 언니”
“엄마, 엄마, 사랑하는 엄마... 제가 가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사랑하는 엄마”
우리가 도착하니 산소 마스크를 하시고 계시던 엄마는 거칠게 호흡하시고 계셨다.
평소엔 주로 눈을 감고 계셨는데 속속 도착하는 자녀들을 보기위해 눈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크게 뜨시고 한 명 한 명 응시하시고 계신다.
“엄마, 엄마, 사랑해요. 그동안 너무 수고하셨고 너무 감사해요. 엄마 딸로 태어나서 우린 너무 행복했어요.”
도착하자마자 한 명씩 사랑을 전하는 자식들을 보던 엄마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고여 왔다. 눈물을 계속 닦아드렸다. 산소마스크에 의지하여 거칠게 호흡하시던 엄마의 호흡이 점차로 안정 되어 간다.
긴급한 위기상황은 이제 넘어간 것 같다.
그제야 언니는 동생들에게 점심식사를 하라고 밖으로 내보내고 난 후 끊임없이 엄마께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엄마 우리가 끝까지 엄마 손 안놓고 옆에서 지켜 드릴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천사들이 엄마의 길을 안내해 줄거에요. 그러니 그 빛을 따라가시면 돼요.
엄마 그동안 너무 수고 많으셨고 감사했습니다.”
언니의 끊임없는 고백에 엄마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흘렀다.
언니가 눈물을 닦아드리며 주무실 수 있도록 눈을 감겨드리자 동생들이 식사를 마치고 김밥을 사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와 엄마 이제 좀 괜찮아지신 것 같네. 주무신다.
언니도 김밥 하나 먹어.”
언니가 김밥하나를 입에 물고 있는데 간호사가 엄마 맥박을 체크하러 병실로 들어왔다.
“이상한데요. 맥박이 안 뛰는데요.”
청천벽력이었다.
3월 19일 12시 52분
엄마는 소천 하셨다.
평소처럼 평안하게 눈을 감고 주무셔서 우리는 위기를 넘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순간이었던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머물 수 있는 마지막 주를 남겨놓고 엄마는 숨을 거두셨다.
“하나님 저희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더 이상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이 병원에서 엄마의 생애를 마칠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엄마의 장례는 조문을 받지 않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영정사진에는 분홍 한복저고리에 흰 숄을 두른 채 활짝 웃고 계시는 엄마가 계셨다.
어쩜 저렇게 고우실 수가 있을까!
전 가족이 이렇게 모여 본 것이 언제던가!
엄마와의 추억을 공유하며,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챙겨주느라 바쁜 그 모습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유아였던 자녀들은 어느새 다 자라 성인이 되어 외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였다.
엄마의 소원처럼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빛나는 가족의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동안 각자 엄마를 1대1로 케어 했기 때문에 함께 한자리에서 만난 이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된다.
장례식장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여자들은 엄마 집에 가서 자기로 했다.
병원생활로 인해 거의 두 달 만에 들어서는 엄마 집이다. 늦은 밤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우리는 동시에 외마디를 질렀다.
“엄마!”
모두 눈물이 가득했다.
현관 앞에는 엄마가 심어놓은 동백나무가 가지마다 화려하게 분홍 꽃을 피우며 어두운 밤을 밝히고 있었다.
불과 한달반 전까지만 해도 꽃은 피지 않았었다.
해마다 엄마집엘 자주 드나들면서 늘 붉은 동백꽃들을 정원옆에서 보곤 했었지만 영정사진에 엄마가 입으셨던 분홍저고리와 꼭 닮은 분홍 동백꽃이 가지 가지마다 활짝 피어있는 모습은 처음이다.
마치 엄마를 보는듯한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우리는 동백꽃을 꺾어서 담아와 입관식에 엄마가 좋아하시던 한복과 함께 넣어드렸다.
많은 성도님들이 함께 해주신 발인예배를 마치고 장지를 떠나기 전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함께 불러드렸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활짝 웃고 계시는 엄마와의 마지막 작별을 했다.
“엄마 이제는 고통 없는 그곳에서 아빠를 만나 편히 쉬세요 엄마”
우리의 마음도 너무 평안하다. 천국으로 가신 엄마를 생각하니 감사함이 밀려온다.
하루전만해도 추웠던 날씨가 풀리면서 장지에 도착하니 햇살이 움츠렸던 몸에 일광욕을 하듯 따뜻하게 내리 쬐인다.
의젓하게 자라난 우리의 아이들이 엄마, 아빠들을 위해 커피를 뽑아서 들고서 저만치에 오는 모습이 보인다. 깊은 위로가 따로 없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흐려 대전으로 가는 길이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은 기세로 잔뜩 찌푸려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현충원 안장식때는 맑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가 계시는 대전 현충원에 도착하니 다시 날이 개여 따뜻한 햇살이 비추인다. 아! 얼마나 감사한지...
멀리서 제부와 조카가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운 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고 있다.
꽃을 꽂아드리자 현충원에서 나온 군인이 안장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고인을 위한 경례와 묵념을 하겠습니다. 일동, 경례!, 고인을 향한 묵념!”
이어서 안장을 하는 관리사가 아빠 비석 옆자리에 미리 파놓은 엄마의 자리에 유골을 받아 안치를 한 후,
“자 이제부터 봉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분씩 나오셔서 흙을 한 삽씩 떠서 부어주시고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버지 옆에 안치된 엄마의 분골 위로 우리는 흙을 한 삽씩 뜨면서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작별인사가 끝나자 관리사님이 남은 흙들을 펴서 잘 다져주셨다.
비가오고 시간이 흐르면 잔디가 올라오니 걱정 말라고 한다.
우리는 평소에 엄마가 즐겨 노래하시던 ‘산 너머 남촌에는’ 그리고 우리가 어머니께 바치는 노래 ‘어머니의 마음’과 ‘mother of mine’을 불러드렸다.
이렇게 엄마를 아빠의 품에 안겨드리고 우리는 진한 포옹으로 서로의 가족들을 안아주었다.
밤이되니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엄마가 소천하신지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남편이 틀어놓은 유튜브에서 비제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중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이 흘러나온다.
멀리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 선율이 귀에 꽂히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엄마의 음성이 너무 그리워진다.
가족 카톡엔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모두들 엄마의 음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동영상과 사진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제야 엄마가 떠나셨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그리운 엄마, 사랑하는 엄마, 너무 너무 보고 싶은 엄마......
그동안 저희들 키우느라 너무나 수고가 많으셨어요.
저희들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며 아끼고 살게요.
엄마 사랑해요.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엄마 안녕! 바이바이!
https://youtu.be/tkfJxpXzq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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