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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교단일기

[교단수기] 사랑은 영원하네

by 김귀자 2010.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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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창을 지도한지도 올해로 18년째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합창은 교직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중․고교 합창지도를 통해 수많은 아픔과 좌절,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고뇌를 겪으면서도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는, 합창을 통해서 자신감을 되찾고 사랑을 배워 가는 아이들을 확인하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교시절 혼성합창단원으로 뽑히면서부터 나와 합창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우리들은 가슴과 영혼으로 노래했고 듣는 관중들 또한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가는 곳마다 호응이 좋아 초청연주가 이어졌고, 우리의 노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었다. 13년 동안 쉬지 않고 합창지도를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린 시절 맛보았던 기쁨 때문이 아닐까?


2

  지난 4월 27일엔 아주 특별한 제자 하나가 찾아 왔다. 마산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합창부원이었던 창한이었다. 창한이는 합창을 하면서 성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극심한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창한이는 3학년이 되어서도 점심시간마다 음악실 주위를 떠나지 못할 정도로 음악에 강한 집착을 보였지만, 집안 형편도 어려운데다가 “남자가 무슨 성악이냐”고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아버지에 눌려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멍한 눈빛으로 말없이 음악실 주위를 맴돌곤 했다. 그때가 5월 쯤 이었던가.

  보다 못한 나는 창한이를 불러내어 “그렇게 하고싶어 하는 일이니까 한번 도전해 보라”고 격려했다. 창한이의 눈빛이 순간 반짝이더니 핑 도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는지 조용히 나가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날마다 노래숙제를 내주며 그 아이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결국 창한이의 아버님께서 그 사실을 알게 됐고, 급기야 그 문제로 학교를 방문하시기에 이르렀다. 무척 떨렸지만 창한이의 아버님과 대면을 하게 되자 난 용기를 내어 “그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간절히 부탁했다. 부친도 그런 내 정성에 감동을 받았는지 말없이 돌아가셨다.

  날마다 열심히 지도하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창한이의 아버님은 결국 아들의 성악레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성악레슨을 허락 받은 시점이 입시가 6개월이 채 남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가족과 나 그리고 창한이는 대단한 모험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난 믿었다. 창한이의 눈빛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1주가 걸려야 해결되는 소리를 하루에 해내면서 그 아이는 6개월간 3년 이상의 공백을 메워나갔고 마침내  세 군데 지망한 학교 모두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계명대학교, 중앙대학교, 경북대학교 세 군데에서 합격통지서가 날아들자 부모님과 나는 말할 수 없이 감격에 휩싸였다. 창한이는 중앙대학교로 진학했다.

  그 후 5년 만인가……. 그 창한이가 서울 국방부 해군군악대에 근무하면서 휴가를 얻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딸기 케이크와 수선화 한 다발! 옛 생각이 떠올라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다.


3

  1998년 3월 나는 지역만기로 마산 고교에서 진해여고로 학교를 옮겼다. 이 학교는 합창부 전통이 대단해서 지휘나 수상경력이 많은 선생님들이 주로 발령 받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알게 모르게 위축감이 많이 생겨났고 그런 나를 보는 합창부 아이들 역시 강한 반감을 나타내곤 했다. 모르긴 해도 전임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나의 모든 지도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이해해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모든 선생님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그 시간, 나는 언제나 음악실로 향했다. 교과공부에 비해 수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도 합창은 단지 취미활동으로만 여겨졌으며, 지금은 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지도하는 내 처지도 인정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주위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갈수록 아이들도 건방져졌고, 그러다 보니 나의 학교생활은 왕 따 아닌 왕 따가 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아이들 인격을 되살릴 수 있는 진정한 교육의 기회가 바로 ‘특별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성적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그것은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깊은 피해의식에 빠져들게 되었고, 내 자신을 위한 수많은 길들을 다 제쳐두고 이렇게 아무 이득도 없이 소모적이기만 한 합창을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 이후로도 아이들과는 계속해서 겉돌았으나 난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아이들이 무척이나 나가고 싶어 하는 합창경연대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이윽고 대회 하루전날 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난 그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도 눈을 감았다. 상처 입었던 가슴을 안고 나는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끊임없는 기도 속에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도를 마친 후 눈을 뜨자 아이들도 모두 울고 있었다. 그제 서야 내 마음을 알아준 것이었다. 진해여고에 부임한지 꼬박 8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우린 합창경연대회장엘 올라갔다. 그날의 전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박정선 곡의 ‘산’을 부르면서 아이들과 난 하나가 되었고 우리는 기쁨의 환희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량’을 수상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아이들과의 거리감을 사랑으로 좁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때부터는 우량에 그치고 만 내 자신의 음악성에 대해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대회장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아이들은 박수로 격려해주었다.


4

  다시 힘을 내서 마음을 모아 1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 다음 해 역시 결과는 똑같은 ‘우량’이었다. 아마 이 시기가 내가 합창을 지도했던 이래 가장 큰 고비가 아니었었던가 생각된다. 어릴 때부터 나 자신에 대한 음악성만큼은 강한 자부심을 가져왔었기에 그만큼 좌절의 깊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가족들도 그런 나를 이해해주기보다는 그걸 기회로 합창을 그만뒀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고, 연주를 하러가도 더 이상 격려 어린 배려를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합창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겨우 신뢰를 회복한 아이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 더 큰 상처를 안겨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은 많이 상실했지만 아이들과 난 정성을 다해 관객들에게 메시지와 감동을 전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그때 지역신문사(경남도민일보) 기자 한 분이 내게로 다가왔다. 우리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게 아닌가! “에너지가 넘치는 훌륭한 합창이었으며 정기연주회를 가져도 되겠다”며 다음날 신문에 리뷰 기사를 써주기까지 했다. 일개 고등학교 합창부가 신문 문화면에 당당하게 게재될 수 있다니, 그것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그것도 공연 리뷰기사로 말이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기자는 신문사 주최로 청소년합창페스티벌을 만들어보고 싶다며 진해여고합창부가 참가해줄 것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와 아이들이 감동과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 기자만큼 정확하게 우리를 읽어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경남도민일보의 김태훈 기자는 그 공연을 계기로 우리 합창부에 대한 탐방기사까지 써줬고, 나중에는 스스로 진해여고 합창부 펜클럽 회장이라며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주었다. 다음은 김태훈 기자가 썼던 진해여고 합창부 탐방기사이다.


  <진해여고합창부 탐방기사> - 2000. 1. 24. /김태훈 기자(경남도민일보 )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지면서 모두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할 즈음 진해여고 예림관은 도리어 조명이 밝혀지고 하나 둘 합창반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다음날 창원시 양곡동에서 열리는 ‘재활을 돕기 위한 이웃사랑 작은 음악회’에 초대된 터라 마지막 연습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반장인 민지는 삼삼오오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는 친구들을 쫓아다니며 체육관 앞 가설무대로 떼밀고, 선아는 준비한 양초를 나눠주며 불을 밝힌다.

“아름다운 세상과 높고 푸른 저 하늘~♪ 모두가 사랑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지어주신 이 세상~♬”

  합창반을 지휘하고 있는 김귀자 선생님의 손짓과 함께 청아한 노랫소리가 예림관을 가득 메우자 체육관은 어느새 중세 성당으로 변하고 합창반은 가운을 예쁘게 차려입은 성가대가 된다. 진해여고 합창반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먼저 밝고 투명한 음색. 진해여고 합창반의 음색은 흔히들 천상의 소리라고 칭송하는 소년합창의 그것과 견줄 만 하다. 어설프게 성인 발성을 흉내 내기보다는 가진 목소리를 바탕으로 다듬어낸 결과다. 다음으론 원숙한 무대 매너. 밝은 표정은 물론이고, 간혹 곁들이는 율동 또한 새롭고 자연스러워 언제나 청중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보다 뛰어난 매력은 바로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것. 악보에 따라 기계적으로 소리를 짜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부터 노래를 우려내 자기의 고백으로 읊조릴 줄 안다.

  “고려가요 <가시리>를 부를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처음엔 그 노래가 어린 저희에게 잘 와 닿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그 노래에 빠져 들다보니 진짜 님이 날 버리고 간 것 같아 얼마나 서럽던지…. 노래가 끝나고 무대 뒤에서 모두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지난해 진해여고 합창반은 무척이나 바빴다. 5월에 있었던 진해YWCA 주최 작은 음악회부터 시작해서 도학예제, 경남합창제 등 12회 가까이 무대에 올랐으니 매달 1번 이상은 공연을 한 셈이다. 특히 연말에 이르러서는 진해여고의 합창실력이 알려지면서 ‘수험생을 위한 청소년음악회’, ‘재활을 돕기 위한 이웃사랑 작은 음악회’, ‘마산청소년관현악단 연주회’ 등에 초청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12월 16일에 열린 ‘이웃사랑 작은 음악회’는 단순히 노래실력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노래로 봉사하는 무대여서 합창반원들은 이 음악회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합창반을 이끌고 있는 김귀자 선생님은 자신의 노래 철학을 ‘사랑’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정교하고 치밀한 노래 훈련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노래가 생명을 잃는다는 말이다.

“저희들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해요. 각자 의지하고 싶은 존재를 떠올리며 우리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함께 비는 거죠. 살아있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부터 열려야 하니까요”

 

5

  이때부터 우리 합창단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준비하는 공연이었지만 이렇게 신문을 통해 자주 보도된 합창부 관련 기사는 우리들을 자신감과 기쁨으로 더욱 하나 되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알려지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초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았고 인격적으로도 존중을 받았다. 이듬해인 2000년. 경남도민일보사로부터 드디어 청소년합창페스티벌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태훈 기자는 이 무대만큼은 진짜 합창부를 위한 무대로 기획하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김태훈 기자가 총 기획을 맡았는데, 그가 이 페스티벌을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출연학교 합창부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때 만든 우리 합창부의 홈페이지 주소는 http://yerim.music.or.kr/ 아이들은 새롭게 장만된 이 공간에 그날그날의 생각들을 글로 올리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청소년합창페스티벌 날짜가 다가오자 아이들은 기대감에 들뜨기 시작했고, 너무나 행복해했다. 이 페스티벌의 타이틀은 ‘하나라는 아름다운 느낌으로’. 다음은 경남도민일보사가 주최한 청소년합창페스티벌을 하루 앞두고 합창부원 효진이가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글이다.


  2000년 6월 9일

  드디어 내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가 저를 멈칫거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는 바로 내일 그 하루뿐입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동안의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노래를 잘 하기 위해,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힘들게 준비해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가 되기 위해 그렇게나 열심히 또 힘차게 준비해왔던 것입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구요? 그건 오늘 저희 합창부원들이 흘렸던 눈물, 그리고 지금 제가 흘리고 있는 눈물, 또 내일 우리 모두가 함께 흘릴지도 모를 그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우리 모든 합창부원들, 그리고 선생님, 기자아저씨 바로 내일입니다. 오늘 이렇게 해가 저물고 다시 해가 떠오르면 바로 그 날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저도 잘 실감이 나지는 않습니다. 지난 두 달의 모든 것들을 내일 하루, 한번도 서보지 못했던 그런 무대에서 단 한번 만에 꺼내 놓아야 한다는 것이 벌써부터 내심 속상해지는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벌써 하나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요... 처음부터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달려왔고 아저씨 말씀대로 어느새 종착역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아름답게 확인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아니...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내일은 서로 서로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로 눈빛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전하는 사랑이 넘쳐서 내일 저희를 보러 와주실 그 모든 분들이 저희들의 하나됨과 저희들의 사랑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너무 제 감상에 빠져 주제 넘는 글을 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를 응원해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던 그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밤엔 각자가 잠시라도 생각에 잠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 우리는 하나라는 이름입니다.....


  아이들의 설레임과 기대 때문이었는지 2000년 6월 10일 창원성산아트홀 대극장에서 열린 청소년합창페스티벌 ‘하나라는 아름다운 느낌으로’는 대성공으로 끝이 났다. 수많은 관객들의 환호와 아이들의 행복한 미소! 특히 마지막 출연학교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하나되어’를 열창한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감동 그 자체였으며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내가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계기 중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교장, 교감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신뢰였다. 지난 2년 동안의 경연대회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언제나 나의 음악성을 믿어주셨다. 두 분 다 딱히 말씀으로 격려해주시지는 않았지만 그런 신뢰는 내게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6

  이렇게 우리의 자신감이 회복되기 시작하자 우리들은 내가 부임하던 첫해부터 계속 꿈꿔왔던 또 하나의 목표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부천에서 열리는 전국청소년합창경연대회에 참가해보는 것이었다. 사실 그 도전은 우리들에게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 대회는 합창을 하는 학교라면 누구나 꼭 나가보고 싶어 하는 권위 있는 대회다. 욕심만 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아이들에겐 분명히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난 아이들의 간절한 소망들을 꼭 이루어주마 하고 약속을 했다. 도전하는 것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아이들에게 원하는 일에 용기를 내어 도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교장선생님 허락만 있다면 부천에 나갈 것임을 알렸다.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했고 간절하게 교장선생님의 결정을 기다렸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우리의 부천행을 허락하셨고 급기야는 부천까지 우리와 동행하셨다. 교장선생님의 전폭적인 신뢰는 내게 새로운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새로운 ‘가을동화’(당시 이 드라마가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를 만들러 가자고 제안했다.

  11월 10일 금요일 오전수업을 끝낸 후 우리들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부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힘든 6시간 이상의 버스여행이었지만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했다. 다행히도 기사님이 우리학교 학부형인지라 자신의 딸처럼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땅거미가 지는 오후 7시. 이윽고 버스는 숙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던 수영이와 현혜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는 게 아닌가. 한 쪽 배를 움켜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은 타 들어가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런데 두 아이들은 쉬면 괜찮을 거라며 병원행을 거부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인 다음 수영이와 현혜를 살펴보니 다소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그래서 난 아이들을 소집했다. 수영이와 현혜도 성하지 않은 몸으로 참석했다. 지금 심정을 말해보라고 말하자 아이들은 하나 둘 그 동안 하지 못했었던 긴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울고 웃고 하다가 휴지 한 통을 다 써버릴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피곤한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면서도 12시를 넘겨가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갑자기 혜란이가 내일 입고 무대에 설 교복 넥타이를 안 들고 왔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정작 본인은 마음이 너무 편하다고 말한다. 그 때를 놓칠세라 아이들 세 명이 동시에 “저도 안 가져 왔어요” 라고 하는 것 아닌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었는데 실로 기가 막혔다.

  그런데 내 마음 역시 이상하리만치 평안했다. 그 순간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학부형이었다. 한 분이 우리와 함께 출발하려고 하였지만 당일 날 아침에 오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당장 전화를 했다. 아직 집에 계시다는 말씀에 아이들은 다시 기쁨의 환호성을 울렸다. 그날 밤은 무슨 첩보작전을 벌인 것 같이 아직도 긴장감에 가슴이 뛴다. 결국 인근에 사는 혜란이 어머님이 학원사에 가서 넥타이를 빌려 봉선이 어머님께 전달했고 봉선이 어머님은 2시나 되어야 부천에 도착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해서 그날 밤은 결국 모두들 마음을 졸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시피 하였다. 난 수영이, 현혜를 데리고 잤는데 아이들이 몸이 안 편한지 계속해서 뒤척였다.

  이윽고 11일 토요일 아침.

  경연대회는 중등부가 1시 고등부가 3시부터 시작한다. 출발시간이 되자 아이들을 다시 한번 살폈다. 수영이와 현혜가 방긋 웃는다. 이젠 안 아프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부천 시민회관에 도착하자 넓은 공연장에 압도되어 아이들의 목소리는 다시 움츠려들기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시도해 본 리허설은 최악이었다. 솔로 고은이가 계속해서 기침을 해댔고 아이들은 부천 시민회관의 피아노 음정이 진해여고의 피아노 음정보다 높아서 이상하다고 불안해했다.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넥타이를 가지고 올 봉선이 어머님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밖에서는 박명 선생님의 차를 누군가 긁어 놓고 도망간 게 아닌가. 선생님은 무척 속상하신 것 같았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는 않으셨다. 2시가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아이들이 환호성을 울린다. 봉선이 어머님께서 도착한 것이었다.

  서서히 출연학교 합창단들이 도착하자 여고합창단의 대부분은 예쁜 단복들을 입고 나타났으며 대부분 경기, 서울지방 학생들로 표준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객석에 앉아 타 학교 합창단의 소리를 대해 비평하기도 했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고 양말을 접어 신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곤 뒤에서 수근 거리기도 했다.

  그런 학생들의 반응을 꽤 예민하게 받아들인 아이들은 내게 달려와 호소를 하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곧 평화가 찾아들었다. 연습에 들어가니 정말 각 학교 합창단들의 실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넥타이를 받아들고 준비를 하자마자 고등부 순서가 시작되었다. 우린 세 번째였는데 첫 번째 팀이 올라가고 두 팀이 준비하게 되어있어 공연장 대기실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내겐 아무런 말도 없이 분주하게 몇 명이 왔다 갔다 하며 안절 부절 한다. 이유를 알고 보니 소프라노의 솔로인 고은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디어 두 번째 팀이 무대로 올라갔다. 초조한 마음으로 막 뒤에서 줄을 섰다. 첫 번째 곡이 끝날 때까지도 고은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 번째 곡이 시작되려 하는데 그제서야 고은이가 들어온다.

 “너 괜찮니?”

 “네”

 “어디 갔었어?”

 “화장실에요.”

  그날따라 목감기가 겹쳐 소리를 잘 내지 못했으며 다른 학교의 압도적인 솔로 소리에 무척이나 위축감을 느꼈던 고은이었다.

  “힘드니?”

  “그럼 다른 아이와 함께 해볼래?”

  “아뇨. 한번 해볼게요.”

  그래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고은이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앞 학교가 퇴장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난 아이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왔는가를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연주가 될 수 있도록 하자고 말하고 기도를 했다. 무대에 올라서니 심사위원들이 밑에 보인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 동안 힘들었었던 일들이 스쳐지나 가면서 간절한 기도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 어려운 무반주 곡 ‘산’과 ‘Cantate Domino.`

  마치 전투기 조종사가 목숨을 걸고 곡예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을 쳐다보는 순간 가슴이 메이고 뜨거움이 온몸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순간 아이들에게도 그 전율이 가슴으로 전해졌나보다. 평소에 그렇게 안 되어서 힘들어하고 절망에 빠졌었는데... 이내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지만 그 어려운 곡을 완벽에 가깝게 너무나 편안한 모습으로 연주해내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다음은 홈페이지에 오른 당시의 아이들 소감이다.


  2000년 11월 10일. 그렇게나 오랫동안 기다려왔었던 날이 드디어 왔다.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던 고된 노력들... 우리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부천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기쁜 마음으로 선생님들의 응원을 받으며 신나게 출발했지만 어느새 그 고마움들이 부담스러워져 갔다. 특히 합창부의 단 4명을 위해 직접 동행하시는 박 명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 지금 생각해보면 이분들이 안 도와주셨다면 우리는 감히 부천에 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여러 생각들이 겹쳤지만 장시간 차를 타다 보니 자연히 피곤이 몰려왔고 우리는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몇 시간을 달리다보니 숙소에 도착했다. 솔직히 우리는 여관 정도를 기대했는데 엄청나게 잘 꾸며진 리조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쁜 마음에 저녁 밥도 많이 먹고 각자 조별로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선생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모두 한 방에 빙 둘러 앉았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각 자 돌아가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라고 하셨다. 우리 합창부 48명의 한마디 한마디가 감동, 그 자체였다. 그 동안 힘들었던 일, 서로 마음이 안 맞아 힘들었던 일,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

내가 세상을 산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감격적이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서로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났고 선생님의 기도를 끝으로 각자 잠을 자러 갔다. 내일 있을 대회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숙소가 용인이라 부천에 가서 리허설이라도 한 번 해보려면 일찍 나서야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졸리고 몹시 피곤했다. 그리고 이 상태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 마음 한 켠에는 한없는 평안과 기쁨이 밀려왔다. 우리가 이제까지 쏟은 모든 노력들을 보여주는 날 이라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떨렸다. 우리는 따뜻한 진해에 살았던 탓에 그 날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다. 그러나 서로 격려 해 주고 챙겨주는 마음에 추위조차 우리에게는 수그러드는 듯 했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부천 시민회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 걸, 문이 닫혀 있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것 이었다. 잠시 후 관리자 아저씨가 문을 열어 주셨고 제일 먼저 도착한 우리가 첫 리허설을 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많이 지쳐 있었던 터라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았고 힘도 쭉 빠졌다. 다른 학교 합창부들이 하나 둘 들어왔고 그런 쟁쟁한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조차 우리에겐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 후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한 번 더 리허설을 했지만 역시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다급한 마음에 밖에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추위 속에 노래를 하려고 하니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를 믿고 좋은 소식을 기대하는 사람들, 우리를 위해 고생하신 선생님, 그리고 영원한 우리의 정신적 지주 김태훈 아저씨(우리를 너무나 많이 아껴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시다.)를 생각하니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서로 몸을 녹여주면서 그렇게 마지막 연습이 한창이었다.

  드디어 대회가 시작되었고 중등부 합창단들이 제각기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중학생이 아니라 성인 합창단 뺨치는 실력이었다. 처음부터 기가 질리는데 너무 불안했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중등부가 끝나고 고등부 차례가 시작되었다. 첫 학교부터 심상치 않았다. 유니폼부터가 프로 합창단 같았다. 우리는 교복에 검정 구두를 신었는데 얼마나 주눅이 들던지... 낯선 곳에서 처음 출전한 대회라 그런지 내가 이제까지 공연한 그 어느 무대보다도 긴장되었다. 그 긴장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러던 중, 우리 차례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무대로 향했다. 오히려 이 때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할 뿐이었다. 무대 뒤에서 줄을 서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잘하자는 말과 파이팅 이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서로 안마 해주고 용기도 주면서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우리는 무대로 나갔다. 선생님께서 심사위원들에게 인사를 하시고 뒤돌아서서 우리를 바라보셨다. 그 때 선생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렇게 긴장 속에서 첫 노래가 시작되었다. 특히 우리에겐 너무나 어려웠던 곡이었다. 한참 노래를 부르는데 갑자기 지난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다. 내가 노래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니까 선생님께서 좀 당황하신 것 같았다. 첫 곡이 끝났는데 조그만 목소리로 선생님께서 잘했다고 말씀 해 주셨다. 더욱 자신감에 차서 두 번째 노래를 불렀는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교장 선생님께서 해 주신 잘했다는 그 한마디에 우리는 마음이 벅 차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최고 였어`라고..

  아쉽게도 44명의 친구들은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서둘러 진해로 향했다. 주말인데다가 차가 너무 많이 밀려 일찍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행히 운 좋게도 남게 되었다. 그렇게 어느덧 마지막 팀까지 모두 끝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다들 너무 훌륭해서 우리가 상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술직히 자신이 없어서 먼저 내려가고 있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기대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

드디어 발표시간이 돌아왔다. 유명한 작곡가이신 나영수 교수님의 심사평을 듣고 이어 수상 팀을 발표했다. 장려상을 발표하는데 솔직히 나는 장려상보다는 우수상을 받았으면 했다. 내 생각과 맞아 떨어지게 다른 학교가 장려상을 수상했다. 다들 너무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부럽던지.. 그 다음은 우수상, 나는 속으로 진해여고, 진해여고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런데 다른 학교가 수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우수상을 기대했는데... 박 명 선생님도 차마 못 보시겠는지 밖으로 나가셨다. 나도 가방을 들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최우수상, 경남 진해여고 합창부!`

  이 말을 듣는 순간 남아있던 우리 4명은 비명을 질렀고 선생님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때 박 명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앞에 상 받으러 나가라고 말씀 해 주셨고 그제서야 우리가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최우수라는 말을 해줌과 동시에 버스에서는 비명이 들렸고 친구들은 모두 울었다. 그동안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좌절과 고통, 이제야 그것들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다.

  상장과 함께 상금을 받고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우리들은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어댔다. 몇 번이나 상장을 만져보고 쳐다보면서 다시 한 번 감격을 느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서둘러 차를 타고 진해로 향했다. 잠시 후 전화가 왔는데 버스 안에서 친구들이 합창부 단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세상과 높고 푸른 저 하늘, 모두가 사랑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지어주신 이 세상....”

  나는 친구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울었다. 친구들의 노래 속에 베어있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드디어 우리가 해낸 것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자랑을 하기 시작했고 빨리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해냈노라고 외치고 싶었다. 차안에서 그 동안 연습 때 힘들었던 일, 아까 떨렸던 그 느낌을 애기하다보니 어느새 진해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에 많이 피곤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합창부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다. 우리 합창부 너무 많이 사랑한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이렇게 감동적인 순간을 맞고서 우리들은 돌아오는 길에 끊임없는 웃음꽃을 피웠다. 그 소식을 집에 전하니 남편도 몹시 기뻐한다. 아이들을 모두 데려다주고 창원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그 모든 일들을 해냈다는 사실이. 우리들의 믿음들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날의 성과는 다시 언론 보도로 이어졌고 다음은 그 당시의 기사내용이다.


  <경남합창수준 전국에 알렸다> - 2000년 11월 14일

  `전국청소년음악경연대회`서 진해여고 합창단 최우수상 수상

  `전문합창단도 벅찬 곡 잘 소화`


  20여 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진해여고(교장 김구영)합창단이 전국규모의 합창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는 경남지역에서 명실 공히 최고의 음악성을 자랑하던 진해여고합창단이 전국규모의 대회에서 얻은 첫 쾌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진해여고 합창단(지휘 김귀자)은 지난 11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천지부 주최로 부천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6회 전국청소년음악경연대회`에서 경기도 부천시의 소명여고에 이어 고등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진해여고가 선보인 곡은 한국 곡 <산>과 외국 곡 <Cantate Domino>. 인간의 인생역정을 잔잔하게 그려낸 박정선 곡 <산>과 기도하는 장면을 현대음악적인 스타일로 담아낸 R. 랭의 <Cantate Domino>는 전문합창단이 소화하기에도 녹록찮은 작품.

하지만 진해여고합창단은 “전문적인 합창단이 소화하기 힘들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곡을 무리 없이 소화해낼 정도로 돋보이는 연주를 펼쳤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이날 대회에 참가한 고등부 10개 팀은 9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이화합창단을 비롯해 전국청소년합창대회에서 3회에 걸쳐 입상한 전북 전주의 기전여고합창단, 경기도 합창경연대회 5년 연속 최우수 및 우수상을 수상한 경기 부천 소명여고 한긷합창단 등 전국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팀들이다. 이런 쟁쟁한 팀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규모의 대회에 첫 출전한 진해여고가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것은 경남합창의 수준을 전국에 알렸다는 평가다.

  경남합창연합회 황덕식 회장은 “전국적인 수준으로 손색이 없는 대회에서 경남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진해여고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는 것은 경남합창의 현 수준을 전국에 알린 개가”라고 말했다. 1.2학년 48명으로 구성된 진해여고합창단을 이끈 김귀자 교사는 “이번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하루 2-3시간 연습했다”며 “전국규모대회에 첫 출전인데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작품을 소화해낸 아이들이 대견하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7

  이렇게 대망의 2000년을 마치면서 부천청소년합창경연대회에서 받았던 상금을 가지고 아이들은  종강파티를 계획했다. 그날 아이들은 기자아저씨와 교장선생님을 초대했다. 그건 2학년 합창부의 졸업식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떤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우리반 가은이는 무비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에서 찍는다고 분주하게 다녔는데 평소와 달라 의아스러웠다. 가은인 내게도 참으로 많은 잔소리를 들었었는데... 그래서 많이 토라졌을 법도 한데 예전보다 더 쾌활하게 내게 다가오다니... 많이 고마웠다. 가은이가 이제야 내 맘을 알아 준걸까!   약 30분간의 행사를 2학년 반장인 아름이가 진행했다. 식순은 1학년의 송사와 2학년의 답사를 시작으로 1학년 간부진의 소개 및 소감발표가 있었으며 이어서 교장, 김태훈 기자님께 선물을 드리는 순서였다.

  아이들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부쩍 커버렸다. 우리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셨던 고마운 분들께 보답을 할 줄 알게 된 것이었다. 그 어느 해보다도 내 마음을 많이 전달했던 아이들이기에 난 칭찬보다는 아쉬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반장인 아름이는 내게 보내는 편지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도 내겐 어머니 이지만 선생님도 나의 어머니 이십니다” 라고 했던가! 정말 찡한 순간이었다.

  아름이의 편지 낭송이 끝나자 아이들은 나를 불러내었다. 어쩜 내 마음 깊은 속 을 그리 잘 들여다보던지... 아이들이 준비한 것은 마흔 세통의 편지와 가방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였다. 추억을 만드는 것을 보아와서인지 아이들은 그날의 모든 모습들을 무비 카메라에 담아서 비디오테이프에 옮겨 내게 줄거라고 한다. 종이가방을 내밀어서 열어보니 예쁜 패션 가방이 들어있었다. 늘 매고 다니던 큰 가방이 비닐이라서 그런지 찢어져 더 이상 가지고 다니지 못하다가 바꾼다는 것이 사진기를 넣어 다니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니는 내 모습에 아이들이 연민을 느낀 것 같다. 악보를 비롯해서 넣어 다닐 것들이 너무 많은지라 아예 예쁜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포기하고 살았다. 가방은 이런 나의 생각을 고려했는지 아주 여러 가지 들이 다 들어갈 수 있도록 충분히 컸으며 다양한 물건들을 넣을 수 있도록 지퍼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악세 사리 꽃까지 단 멋진 폼이 나는 가죽 가방 이었던 것이다.

  편지바구니를 바라보자니 마음이 저려왔다.  그러자 아이들이 합창반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세상과 높고 푸른 저 하늘 모두가 사랑하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노래하는 아이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장소 형편상 더 이상의 노래를 하지 못하고 식사시간에 들어가야만 했다. 긴 식사시간과 대화 ... 어느덧 예약된 시간이 다 되어버려 우리들은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 종례는 합창으로 하였다.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곡으로 두곡을. <사랑은 영원 하네>

  내가 천사에 말 한다 해도 내 맘에 사랑 없으면...

  김태훈 기자가 행사에 맞게 개사하였던 <Those were the days >

오늘처럼 멋진 주말을 지나치기 너무 아쉬워 지친가슴 벅찬 이 마음 무엇으로 채워줄까...

2학년 아이들은 울기 시작했다. 여러 아이들이 내게 반문하였다. 선생님, 진짜 오늘이 마지막 인가요? 모두들 식당 밖으로 나왔지만 갈 생각들을 하지 않고 있어서 난 홈페이지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모두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난 막바로 컴퓨터 앞에 앉을수가 없었다. 그 마흔 세통의 편지가 궁금해서... 긴장됨과 설레 이는 마음으로 아이들의 편지를 읽어내려 가기 시작하였다. 왜 그리 가슴이 아픈지... 그리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내가 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렇게 오랜 동안 함께하고 같이 고생하면서 하나를 이루었던 지난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그 애틋했던 2학년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왜 이리 가슴한편을 저리게 만드는지... 이젠 더 이상 안 아파해도 될 나이인 것도 같은데 난 변함없이 그 아픔에 잠을 못 이룬다.

  이 맛에 교사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해가 갈수록 교사가 된 것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이 넘쳐나고 있다. 비록 모든 선생님들이 퇴근하는 시간부터 나의 아이들과의 시간이 시작되는 늘 혼자만의 외로운 길이지만... 교사가 된지 17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제자들이다. 모든 교사들이 진심으로 학생들을 사랑하며 이끌어준다면 이 나라는 좀 더 희망으로 가득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8

  아름다웠던 2000년이 지나가고 2001년이 밝았다. 이제 어려움이 끝나는 가 했더니 다시 새로운 어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들었던 2학년 합창부원들을 보내고 나서 새로운 신입생을 뽑아야 하는데 내가 이 학교로 부임한 이래 가장 작은 숫자의 지원자를 보면서 다시 절망을 맛봐야만 했다.

  반을 돌며 간절하게 호소하였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 또 기존 멤버 중 가장 핵심인물인 반주자와 파트 장을 비롯한 여러 명이 개인사정으로 그만둬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부모님과 본인을 통해서 들어야만 했다. 결국 사분의 삼 이상의 부원들이 교체 되었고 지원자의 거의다가 합격을 하였다. 결국 작년보다 1명이 적게 뽑혀 46명의 정원을 겨우 웠다.

합창부 조직 2주도 안될 즈음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해예총으로부터 4월1일 군항제때 ‘거리의 축제’ 공연에 나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지역에서 이미 작년의 활약이 소문이 나버린 터라 기대감을 가지고 우리를 공연에 초대하였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어려운 첫 공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벚꽃예술제 열림 마당에서의 합창부 첫 공연은 진해 ‘문화의 거리’ 에서 열렸는데 아이들은 기대이상으로 잘 해내어 시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멤버의 사분의 삼이 바뀌었고 인원도 채 모집을 못한 상태에서 출발했던 나의 합창부였는데... 정말 감격스런 공연이었다. 아이들은 감격과 사랑 안에 흠뻑 취해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난 너무도 행복했다. 그래 이것이 인생이야! 인생은 수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가에 달려있어!

난 아이들에게 늘 건강하게 도전하는 모습들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볼때마다 교사로서의 무한한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제부터 출발이다.


9

작년에 꼭 아이들을 위해 이루어주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해군사관학교에서 연주하는 것이었다. 멋진 생도오빠들과 저녁을 같이하고 그 오빠들 앞에서 연주한번 해보는 것이 또한 아이들의 소망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망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은 우리도 몰랐다.

첫 연주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해군군악대와 해군사관학교로부터 연주 초청을 하는 전화가 온 것이었다. 해군군악대는 이 지역에서 뛰어난 관악합주단 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러한 공연요청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줄지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해군사관학교에 갈 생각을 해서인지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은 기대감에 젖어 방실방실 웃어댄다. 4교시 마치고 나머지 수업은 모두 제끼고 가는 건데 어찌 좋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것도 학교에서 출석을 인정해주는 공식 연주라서인지 반마다 부러움에 섞인 눈초리가 가득하다.

공연을 통해서 아이들의 합창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의 공연을 보아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다시 불러주는 것을 볼때 매 공연마다의 최선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공연제의에 일일이 응할 수는 없지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때 같이 공연한 성악가로부터 5만명이 모여드는 부산해운대에서의 공연까지 추천을 받게 되고나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드디어 해군버스가 교문밖에 도착했다. 버스에 탄 아이들은 가는 동안 내내 이야기 꽃이 넘쳐났다. 사관학교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입을 다문다. 짧은 리허설을 통해서 공연은 이내 시작이 되었고 ‘바다의 노래’등의 군가를 외워서 노래하자 생도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앙코르를 외쳐대는 생도들의 함성은 아이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고 행복하게 했다.

연주가 끝나자 3년 전 마산고를 졸업했던 제자들이 몰려와서 내게 경례를 한다. 제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아이들은 여생도의 기숙사까지 방문하게 되었고 식당에서 생도들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도 가졌다.

생도들의 세련된 매너와 존대어 덕분에 아이들은 마치 공주가 된 것처럼 행복해했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인격적인 존중을 받고 있고 성인으로 예우를 받음으로써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이들의 만족도는 최상 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의 마음에 꿈과 희망이 새롭게 아로새겨졌다. 더 이상 이성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않아도 충분히 이 사춘기를 외롭지 않게 잘 견디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확신이 선다.


10

그렇게 바쁜 5월을 보냈다. 이제 다시 새로운 음악회를 기다리고 있다. 올해에 가장 기다려지는 공연이 있다면 6월23일 오후 5시 창원 성산아트 홀에서 있을 경남도민일보 주최 제2회 청소년합창페스티벌과 12월15일 오후 5시 진해시민회관에서 가질 예정인, 우리들의 염원이었던, 합창부만의 첫 번째 정기연주회를 꼽을 수 있다. 수많은 공연들이 있고 각 합창부들의 우열을 가르는 합창제들은 많지만 이 음악회가 특별히 기다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합창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청소년들과의 화합에 대한 설레 임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10년을 넘게 합창을 지도해왔지만 난 최강 합창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는 않았다. 내가 노력해왔던 것은 합창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고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는 일이었으며 공연 그자체 보다는 그 과정을 통해서 각자가 앞으로 나아갈 인생을 준비하는 창조의 시간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지도교사들 모임에서 발성과 소리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때때로 위축감을 느끼곤 한다. 사실 그런 것들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소리나 발성을 가장 잘 가르치는 교사로 알려진다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합창을 통해서 아이들이 고교시절에 추억에 남을 수 있는 풍성한 시간들을 만들어 주거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모든 마음들을 주력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아이들은 음악을 통해서 상처받은 인격이 되살아나게 되며 그 노래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 때때로 천사가 되기도 하고 인생을 다 살아버린 나그네가 되기도 한다. 겸허하고 주위를 보살피는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아이들의 아름다운 합창에 대한 찬사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작년에도 너무나 아름다웠던 페스티벌이었지만 2회를 맞는 청소년합창페스티벌은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올해의 주제는 ‘우리, 하나 되어’. 그것은 진정하게 합창부들을 위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 공연을 위해 아주 특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먼저 입장곡 선곡부터 심혈을 기울였다. 샹송 `마리자 강변의 추억`을 개사하여 관객과 합창단이 하나가 되어 추억에 젖는 낭만적인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안무도 새롭게 넣어봤다.


아 벚나무 피는 고향

그대 함께 손잡고 거닐던 지난날이

지금도 그리웁네 그리워

잊을 수 없는 순간들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이 머무는 곳 사랑의 발자취 그리워


아름다운 친구들과 무대위에 서서

축제의 오늘을 노래로 화답해 그리워

여기에 모인 여러분 손에 손을 잡고서

리듬에 발맞추어 함께 춤을 춰요 그리워  음~~~

리듬에 발맞추어 함께 춤을 춰요 그리워


중간에 샹송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반장인 다혜가 앞으로 나와 멘트를 넣도록 했다.


“여기에 계신 가족, 친구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희와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11

올해는 광주와 부산에 있는 합창단까지 초청하여 아이들의 설레임은 더하다. 광주여고, 부산진고, 마산제일여고, 창원남산고, 진해여고를 비롯해 해군군악대가 함께 연주했고, 마지막으로는 연합합창단이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를 예정이다. 이 연주를 통해서 타시도 청소년들과의 우정어린 만남은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 아주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축제의 날로 기억하기 위해서...

한참 선곡과 전체 작품에 대한 구성에 빠져 내 나름대로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낼 즈음 언제나 사랑과 평화가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합창부에게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요즘 아이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것이 심상치 않더니 마침내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진다. 하나, 둘도 아니고 전체적인 위기인 것 같다. 나는 많이 놀랐다. 지난 중간고사 때 합창부원 과반수의 성적 하락해 한 명이 공연에 참여할 수 없게 된 불상사가 생겼다. 아이들은 모두 심각했으며 위기감이 감돌았다.

게다가 페스티벌을 이틀 앞두고 2학년들이 수련활동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성적하락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연습에도 잘 참여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픈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아이들의 표정은 언제부터인가 성난 듯한 표정으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아직 안무도 제대로 짜이지 않았는데 아이들의 무거운 얼굴과 무기력한 표정으로 봐선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46명밖에 되지 않는 부원들의 조각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온몸에 오한이 엄습해온다. 하루 종일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 하다보니 그간의 힘들었던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힘든 마음으로 토요일 날 합창부내에 홈페이지 부를 데리고 김태훈 기자로부터 컴퓨터 연수를 받았다. 근데 안무 조 10명도 함께 남아서 안무를 짜고 있다고 한다. 기대도 안했었는데! 오후 5시를 넘기면서까지 아이들과 함께 의논하고 연구했다. 힘든 상황이지만 다시 아이들이 일어서기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힘들고 복잡한 상태에서도 합창반장인 다혜는 “선생님, 우리가 힘든 만큼 이번 공연은 감동적일 거에요”라고 도리어 선생인 나를 위로한다.

그런데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늘 잘해왔고 믿었던 아이였는데... 다른 아이들에 대한 눈빛과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다르다면서 미워하지 말란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연습보다도 더 힘들어 합창부에 오기가 싫다는데...

늘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내가 행사를 앞두면 언제나 작전지휘관처럼 냉정해지고 엄격해진다. 그런 나를 몇몇 아이들은 충격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항상 웃어만 줄 것 같은 선생님의 냉담한 모습이 갑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나보다고 생각을 하고선 시무룩한 표정에 슬며시 사라져버린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도전을 해서인지 상처도 컸다. 정말 살얼음판을 걷는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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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이 위기가 있으면 극복의 시간도 반드시 있는 것인가 보다. 아이들은 다시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하여 아이들에게 난 마음을 다해서 현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서서히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가 목요일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공연불가 명령을 받은 아이가 함께 출연하기로 약속했고 나에게 오해가 있었던 아이들이 대화로 마음을 풀었다. 그날따라 미국인 친구 쉐리가 미국에서 오신 가족들을 모시고 5시에 우리 공연 리허설을 보러오기로 약속 했고 합창페스티벌 CF도 목요일에 찍기로 해 무척 바빴다.

예정대로 4시부터 CF를 무사히 찍는 동안 가사를 아직 덜 외운 아이들이 연습에 몰두했다. 5시 정각이 되자 쉐리가 미국에서 한국을 방문하신 부모님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예림관으로 왔다. 7명의 관객을 앞에 놓고 마치 1,700여명의 관객이 있는 성산아트 홀에서 공연을 하듯이 정성을 모두었다.

그런데 그렇게 소리, 가사 그리고 안무가 제대로 안 짜여서 고민하던 아이들이 그날따라 모든 노래를 얼마나 잘 소화해내던지 그만 내가 감동을 받고 말았다. 쉐리의 가족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줬다. 결국 우리들은 해낸 것이었다.

매일 7시, 8시가 되어서 퇴근을 하면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던 시간들이 이제야 보상을 받는듯이 온 몸이 나른해져왔다. 정말 이 기쁜 성취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언제나 합창 공연을 앞두고 겪는 피가 마르는 아픔이지만 이 공연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은 나날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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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공연 날이 다가왔다. 6월23일 이날은 장마전선 영향으로 비가 내렸다. 작년엔 1700석이 다 차고도 200명이 돌아갔다고 하는데... 올해는 영 관객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대성공 이었다. 그 어떤 공연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진면목은 무대에서가 아니라 무대 뒤에서 일어났다.

연주를 앞두고 아이들은 많이 갈라져 있었다. 내놓고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고 감싸줄 수 있는 포용력을 발휘하기엔 자신을 먼저 앞세우고 있었다. 결국 모든 일들을 그들이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낮추어 서로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높은 장벽들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던 일들이다.

그런데 연주당일 아이들은 아주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아주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침부터 찬물을 끼얹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타 학교 학생으로부터 영문도 모른 상태에서 냉대를 받은 것이었다.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타 학교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해 선물까지 준비했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냉대였으니까. 내가 들어서자 아이들은 누가 잘잘못을 했는가에 대한 책임전가를 시작하였다. 그때 난 아이들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사랑’을 이번 기회에 한번 체험해 보자.”

실제로 우리들은 늘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 사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감싸 안을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체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간부들보고 먼저 그들에게 가서 사과를 하고 준비해온 선물을 전달하라고 했다. 모든 학교를 돌고 온 간부들은 얼굴에 기쁜 미소를 함박 띄고 돌아왔다.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다시 서로에게 마음이 열렸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공연에 참가하였다.

이번 공연의 가장 큰 목적은 페스티벌 타이틀과 같이 ‘우리, 하나 되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마음을 맞춘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무대 위의 합창단과 관객이 함께 ‘하나 되어’를 부른 그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였지만, 행복한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더불어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닫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교육의 장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너무나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


<사랑은 영원하네>


내가 천사에 말 한다해도 내맘에 사랑없으면

내가 참 지식과 믿음 있어도 아무소용 없으리

산을 넘는 믿음이 있어도 내 가진 모든 것 줄지라도

나 자신 다주어도 아무 소용없네 소용없네 사랑은 영원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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