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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Photo Diary

빛 바랜 가족사진

by 김귀자 2015. 1. 12.

서문

 

군인가족들은 하나같이 아픔이 있다. 특히 평균 17번 가까이 근무지를 옮겨야하는 직업군인들의 자녀들은 잦은 전학을 하거나 부모와 떨어져 불안정한 학창시절을 보내야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런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아픔을 겪어야 했지만 그 시절의 기억들은 내게 슬픔을 넘어선 성장의 시간이 되었다.

누구나 가족에 대한 소중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희미한 옛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어느날 우연히 유튜브에서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에서 가수 김진호가 불렀던 '가족사진'을 듣게 되면서 부터다. 내게도 그런 고백과 빛 바랜 가족사진이 있다. 이제부터 나의 어린 시절의 가족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보려한다.

 

회상

 

벚꽃이 한창일 때 팔순이 넘으신 엄마와 함께 진해 장복산에 벚꽃놀이를 다녀왔었다. 그때 엄마는 탄성을 지르시고 계셨다.

" 아 바로 여기구나. 예전에 울창했던 나무들이 그대로네.”

벚꽃을 보며 옛 기억들을 되살리시는 엄마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내가 8살 때 아버지와 함께 왔었던 이곳을 50년만에야 찾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회가 새로우실까!

사진첩에서 보았던 언니와 찍었던 8살 사진의 배경이 바로 장복산 이었다는 것을 이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때의 그 장소 모두 가물가물 하지만 8살 때 찍었던 빛바랜 가족사진을 찍던 순간만큼은 너무도 또렷하다.

 

 

안타깝게도 날씨가 흐려 화려한 벚꽃의 모습이 잘 나타나지가 않는다. 길가다 예쁜 꽃만 보면 멈추시고 한참을 바라보며 좋아하시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니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오버랩 된다. 교편을 잡으셨던 어머니는 하얀 정장 투피스를 자주 입고 다니셨다. 학생들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여 매사에 열심이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동에 따라 재직하시던 초등학교에 사표를 내고 하던 일들을 모두 접은 채 최전방으로 가시게 된다.

해마다 방학 때가되면 아버지는 강원도 원통의 최전방 군인관사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 헌병대장 지프차 27호를 타고 서울로 오셨다. 춘천을 지나 한계령 고개를 넘으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해서야 원통에 있는 군인관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관사에서 우리는 많은 추억들을 만들었다. 우비를 입고 트럭 짐칸에 앉아 비껴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던 어린 시절!

다정했던 아버지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순간들, 램프를 비추며 밤새도록 경이롭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관사 앞에서 눈싸움을 하던 순간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겨울이 되면 우리들은 어김없이 아버지와 함께 스케이트장으로 향했고 함께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 오브 뮤직은 군인 아버지와 음악가족이었던 우리 집을 두고 만든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우리집과 닮아있었다. 극중 마리아역할은 내 담당이었는데 집에 놀러온 친구들과 손님들이 돌아갈 때면 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사운드 오브 뮤직OST So Long Farewell을 부르며 배웅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마리솔을 보게 되었는데 주인공 엄마의 노래와 육성이 녹음된 것을 보물처럼 간직하는 장면을 보면서 추억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기억해 놓았다가 피아노로 옮기는 것을 즐기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난 우리 가족뿐 아니라 친구의 이야기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노래로 만드는 것이 소일거리가 되었다.

모두들 모여요 아가씨들 즐겁게 노래를 불러보세요.”

옥길 양, 수경 양 모두 나와요 즐겁게 놀아 봐요

다행히 언니와 동생들은 그 때 만든 우리 집 찬가를 곧잘 중창으로 소화해냈고, 난 이것을 정성스레 녹음했다. 아마도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랬었나보다.

 

슬픔

 

부모님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은 마냥 행복했지만 이렇게 달콤했던 방학이 끝나면 우리는 곧 헤어져야하는 것을 알기에 방학은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교차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기차역으로 배웅을 나와 주셨고 기차 안까지 들어와 짐을 선반에 올려놓아주시고는 기차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셨다.

해마다 어버이날이 되면 난 카네이션을 들고 공원을 찾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지미 오스몬드의 `Mother of mine`을 몇번이고 불러대며 걸어 다녔다.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한다는 것은 큰 슬픔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대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815일 광복절. 평안했던 최전방이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을 당하면서 갑자기 초긴장 상태로 변해버렸다. 헌병대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부터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하셨다. 그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중병을 얻으셨고 제대를 하시게 되셨다. 제대하시던 날 옥상에 말없이 서 계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지금도 아프게 떠오른다.

 

비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시장까지 손수 우산을 들고 마중 나가시던 아버지! 투병 생활 와중에도 엄마에 대한 사랑은 지극 정성이셨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던 1991429일 오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수업을 하던 내게 갑자기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던 것일까!

교무실을 나오려는데 하염없이 퍼붓는 빗줄기를 뚫고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귀자야, 아빠 갈게. 잘 있어라`

. 아주 편안하면서도 고요한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남편이 빗길을 뚫고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찍었던 비디오를 틀어놓고 TV를 부둥켜안고 우는 동생을 어떻게 위로할 길이 없었던 그 순간.

집안의 전부였던 아버지를 잃고, 이어진 화장터에서의 이별. 화장터 주변은 4월이라 봄꽃이 만발했다. 따뜻한 봄 햇살에 너무나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봄꽃들. 그러나 그 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이 세상은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대전국립묘지에 총성이 울리고 아버지는 안치되셨다.

인생은 찰나라고 했던가. 짧은 인생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자니 가슴이 아파온다. 아버지는 떠나셨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공유했던 떠나온 둥지를 가슴에 간직한 채 사랑하는 가족들은 오늘도 감사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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